아카시아나무에게 권력과 인생을 묻다
- 박정희와 함께 헐벗은 국토에 등장해서 산림을 살리고
폭풍의 저격으로 생을 마감하는 아카시아나무 이야기 -
홍사종(미래상상연구소 대표)
필자의 고향집 옥란재의 아카시아 나무. 40,50년 자라면서 수세(樹勢)가 약해져 왕성하게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잘못된 상식
잘못된 상식이 유통되면 세상에는 불의의 변(變)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독교가 중세(中世)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시절, 교회지도자들은 백성을 쉽게 종교의 품안에 넣고 길들이기 위해 ‘마녀(魔女)’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만들어냈다. 악마와 천사
1의 대위법(對位法)은 선(善)과 악(惡)으로 양분되어있는 세상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했고, 바로 소위 ‘악마의 파티에 참석한’ 부녀자를 고문해서 불태워 죽이는 마녀사냥은 ‘보편적 상식’의 당연한 결말이었다. 인간의 집단 새디즘적 광기는 이렇게 잘못된 상식의 유통으로부터 출발할 때가 많다.
대개 이런 경우는 막연한 확신과 이를 사실인 것처럼 유통시키는 사람들의 무지가 원인이 된다. 과학에 무지했거나, 아니면 진실을 확인하거나 알아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이 만든 비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세상의 진실은 어둠 속에 갇혀버린다.
어디 잘못된 상식의 유통이 역사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세상에는 가려내야 할 잘못된 상식이 많다.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아카시아나무는 일제가 우리나라 산을 망치려고 심었다지요?”
작년 오월 화창한 봄날, 아카시아나무꽂이 핀 골프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동석한 변호사와 나무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 내가 받은 질문이다. 전북이 고향인 이 변호사는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아카시아나무는 일제(日帝)가 고의적으로 우리 강산에 심어놓은 나무’라는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화성시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나 역시 초등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수 없이 들었다. 농촌에서 자란 대부분의 성인 남녀들의 뇌리 속에 아카시아나무는 유년시절 그 꽃의 향기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가시 때문에 나무하기도 어렵고’, ‘땔감밖에 용도가 없고’, ‘무서운 맹아력(萌芽力)’으로 온 산을 망쳐놓는 나무’ ‘조상 산소를 파고 들어오는 못된 나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어른들로부터 사사(師事)받은 대로 나의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고정관념도 중․고등학교시절까지 그 정도에 머물러 있었음을 고백한다. 기억하건대 1970년대 내가 살던 동네의 모든 야산은 아카시아나무 천지였다.
조선 솔이 울창했던 우리 집 뒷동산을 제외하고 동네 산이란 산은 죄다 민둥산이었다. 봄부터 좀 모질다 싶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날이면 산등성이로부터 쏟아져 내려오
2는 시뻘건 황토물은 도랑에 넘쳤다. 장마철 폭우에 이 산 저산 깊은 계곡이 생겨나는 것은 예사였다. 토사(土砂)를 막는답시고 정부에서는 사방(砂防)공사를 실시했는데, 사방공사용 나무심기의 수종(樹種)이 대부분 아카시아나무,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였다. 뿌리 뻗기를 잘 하는 아카시아나무는 금세 산을 뒤덮었고, 땔감이 모자라는 동네 사람들은 산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무지게를 지고 이 산 저 산을 몰래 옮겨 다녔다. 집집마다 아궁이를 갖고 있었던 동네 사람들이 산에 가서 제일 먼저 자르는 나무 또한 아카시아나무였다. 그야말로 화력도 좋고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땔감이 아카시아나무였기 때문이다.
맹아지(萌芽枝)에서 돋아날 때부터 무시무시한 가시를 달고 자라나는 아카시아나무는 그렇게 빈곤하고 남루했던 시절에 사람들에게 부족했던 시비(柴扉)와 양봉가(養蜂家)들에게 중요한 밀원(蜜源)을 제공해주었지만 온갖 천대를 받으며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속 잘라도 없어지지 않는 아카시아나무의 맹아지가 소나무와 밤나무 등 선호하는 품종의 나무만 가꾸고 싶었던 산주(山主)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땔감의 부족이 없었던 우리 집의 경우 막 식재(植栽)를 끝낸 뒷동산의 리기다소나무 묘목쪽으로 뻗어오는 아카시아나무숲의 팽창을 막기 위해 한 겨울 일꾼을 동원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크라묵손, 근사미(글라이포세이트)’라는 제초제(除草劑)가 아카시아나무 맹아를 박멸시키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나도 아카시아나무를 박멸하기 위해 읍내에 나가서 제초제를 무수히 사서 뿌린 기억이 생생하다. 베어진 나무뿌리 끝동 여기저기 붓으로 제초제를 바르고 또 발랐지만 기적처럼 아카시아나무는 비만 오면 새순을 돋곤 했다. 1960년대 1970년대- 그 시대의 숲의 권력자는 단연 아카시아 나무였다. 결국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쳐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사람의 손길이 많이 타는 인구밀도 조밀지역의 야산을 독차지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많은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바로 아카시아나무 무용론(無用論)을 가르쳐준 당시의 어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朴正熙) 전(前) 대통령이 실시한 산림녹화(山林綠化)사업의 주요 사방림 중 하
3나가 아카시아나무였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 역시 아카시아나무,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등을 1960년대 후반 사방공사에 동원되어 심은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당시의 어른들은 자신들이 심은 아카시아나무에 냉랭한 시선을 보내며 자신들과의 인과(因果)를 부정했을까. 부정한 것이라기보다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점이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나중에 자세한 설명을 하겠지만 일제시대 아카시아나무가 우리나라에 심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한 어른들은 왜 우리 강산에 아카시아나무가 보급되게 되었는가하는 중요한 배경을 외면한 채 ‘일제가 심었다’라는 감정적인 점만 부각시켰다.
‘일제가 우리강산에 가시투성이의 아카시아나무를 심은 것은 아마도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산이 아카시아나무의 폐해(弊害)로 고통(?)을 입고 있을 때 일제가 심었다는 사실은 아주 좋은 감정적 먹이감이 됐다.
그 옛날 아카시아 숲이었던 옥란재 뒷동산에 쓰러져 있는 40,50년생 아카시아 나무. ‘총 맞 은 것처럼’ 쓰러진 아카시아 나무 사체 옆에 산벚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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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카시아나무는 일제가 우리 금수강산(錦繡江山)을 망치기 위해 심은 나무라는 고약한 상식을 뒤집어썼다.
그 잘못된 상식은 2009년 3월 경상북도 문경에서 있었던 영화촬영지의 일화에서까지 소개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김충렬 감독의 인터뷰기사에서 주인공 할아버지에 대한 일화(逸話)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자꾸 산에 가서 아카시아나무만 베길래, 왜 힘들게 아카시아나무만 베시냐고 물었더니, ‘일본 놈들이 우리 산을 망칠라고 심은 거라서 이것부터 벤다’고 했다. 이 부분은 혹시 문제가 될 것 같아 편집에서 잘랐다. 괜히 일본과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이다.”
김 감독의 큰 안목에 고마워하기만 하기 에는 왠지 씁쓸하기 짝이 없는 예화(例話) 가 아닐 수 없다.
경북 칠곡의 아카시아 숲에서 양봉인들이 ‘일제가 심은 아카시아 나무’라는 잘못된 상 꿀을따고 있다. 식과 유사한 일이 서울 한복판 세종로 은행 나 무 에게도 일어났다.
‘세종로의 은행나무는 일제가 한반도 영구지배를 목적으로 심은 나무이기 때문에 뽑아서 옮겨야한다’는 여론과 광장 조성을 이유로 자라던 곳에서 뽑혀지는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 은행나무는 용문사의 천년거목 은행나무가 말해주듯 일제시대 이전에도 이
5 땅에서 자라왔고, 인간이 이 지구상에 출현하기도 훨씬 전인 2억8000만 년 전에도 지구의 원주목(原主木)으로 이 땅을 지켜왔다. 메타세쿼이아와 함께 화석(化石)나무라고 불리우는 은행나무의 생명력을 일제지배의 영구화로 상상해서 엮어내는 무지한 사람들의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 상상력 때문에 우리 의 세종로 은행나무들은 팔다리가 잘려 이리저리 실려 다니는 서글픈 신세로 전락됐다. 일제와 얽힌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잘못된 상식은 여기까지다.
그 밖에 아카시아나무와 이어진 우리들의 인연은 대부분 정서적인 부분으로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이 나무의 생애를 잘 들여다보면 정말 대단한 인생과 권력의 흥망사를 그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한때 전체 산림의 10여 %를 장악하고 번영했던 아카시아나무숲이 지금은 불과 전체 숲의 2% 미만 밖에 유지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무지한 상태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던진 속설(俗說)만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속내를 잘 내 비치지 않는 사물 속에는 보석과 같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세계의 단면이다.
그 많던 아카시아나무 어디로 갔나
초등학교시절 어른들과 함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용두리의 집, 옥란재(玉蘭齋) 뒷동산에 심어져 내 생애와 함께 살아온 고향의 아카시아나무는 지금도 나의 숲과 나무를 이해하게 해주는 선생이 되어주고 있다.
무차별적인 연료채취로 우리나라의 산이 몸살을 앓고 있었을 1970년대 초, 또 다른 재앙이 우리 숲을 덮쳤다. 소나무 송충이가 극성을 부린 것이다. 초등학생인 나와 학우들 모두 송충이 잡기로 동원되던 그 시절, 우리집 뒷동산의 수백년 아름드리 조선소나무도 그 피해를 입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가서 허가를 받고 부랴부랴 송충목을 베어 서울에서 온 나무장사에게 팔았다. 그 거대한 소나무림은 수백년 동안 조상들이 지켜온 옥란재의 소중한 상징숲이었다. 이후 산사태 방지를 위해 2만여평의 산에 인위적으로 심어진 나무는 리기다소나무와 일정부분의 아카시아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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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밖에 참나무류, 팥배나무, 때죽나무, 오가피나무, 헛개나무 보리수나무, 일본목련나무, 밤나무, 노각나무, 음나무, 두릅나무 등 70여종의 나무종류가 다양하게 분포한 아름다운 숲으로 변신했지만, 당시만 해도 옥란재 뒷산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야산은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 등 몇 종 안되는 나무들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당시 벌거벗겨진 산에 심겨진 이후 엄청난 맹아력으로 온 산을 덮을 듯 맹렬하게 자라나던 그 많은 아카시아나무는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통계조사에 의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아카시아숲은 전체 숲의 2%정도인 12.5만ha에 불과하다고 한다.
중․장년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의문일 정도로 아카시아숲은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다. ‘동구 밭 과수원 길’에 그 많던 하얀 아카시아꽃과 향기는 어디로 갔을까.
서울한복판 남산에 번성하던 아카시아나무도 이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서울시가 ‘나쁜 나무’로 지정하고 마구 베어 버려서이기도 하지만, 40~50년을 살면 제 힘에 겨워 쓰러져 사라지는 나무도 많기 때문이다.
서울 야산 등성이에 쓰러진 나무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다 40년에서 50여년정도의 수령(樹齡)인 아카시아나무들이다. 북한산과 청계산 등지의 등반로를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쓰러진 아카시아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숲 가꾸기 근로사업 중에 쓰러진 아카시아나무로 벤치를 만들어 재활용하는 구청도 많다. 양천구의 나무벤치 상당수는 이 쓰러졌거나, 베어낸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졌다.
서울뿐이랴. 일제가 심어서 우리강산을 망치려 했다던 아카시아나무는 전국적으로 지방자치단체의 무지막지한 산림행정에 의해서 궤멸당하고 있다. 산에서 나무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지만, 산간오지의 사람들은 무의식속에 드리워진 고정관념이 시키는 대로 ‘나쁜 나무’ 아카시아나무부터 도륙(屠戮)을 했다.
이 와중에 제일 가슴에 멍이 드는 사람들이 양봉농가들이다. 년간 꿀 생산량 3500억
7원 중 70%에 상당하는 꿀을 이 나무의 꽃으로부터 생산하기 때문이다. 양봉하는 분들은 다시 우리 강산에 아카시아 나무를 심자고 한다. 한쪽에서는 ‘나쁜 나무’ 아카시아나무를 국민의 혈세를 써가며 도륙하고 있고 또 한쪽은 효자 밀원 수종인 아카시아나무를 다시 심자고 아우성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말이 맞는 말일까.
나무의 삶속에는 문화와 한 시대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스페인과 모로코 이태리 등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지중해지역을 여행해 본 사람들은 마치 우리나라 소나무인 적송(赤松)과 같이 우람하게 잘 자란 지중해의 소나무를 인상 깊게 기억할 것이다. 하늘을 찌르고 우뚝 서있는 기상(氣像)도 기상이거니와 초록색 여인의 치맛자락을 뒤집어놓은 것같이 풍성한 가지에 감탄할만한 소나무는 특히 로마의 멋진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낸다. 레스피키의 유명한 곡 <로마의 소나무>는 우렁차게 하늘을 받치고 있는 지중해 소나무들을 향한 찬가(讚歌)다. 소나무의 생김으로 보면 우리나라 소나무인 적송과 동일하지만, 산림과학원이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소나무의 총 종류는 120여가지나 된다. 조선소나무도 적송과 흑송(黑松․해송)으로 분류가 되지만, 우리나라 안에서도 지역적으로 서로가 형질이 조금씩 다른 소나무들이 수없이 분포하고 있다. 지중해의 소나무는 우리 소나무와는 완전히 다른 품종이다.
이 소나무에 반해버린 나는 그만 ‘이 나무를 한국에 옮겨 심는다면 어떨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옮겨 심는 방법은 딱 한가지다. 어린 소나무 묘목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소나무 묘목을 구 할 수 있더라도 비행기까지 싣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다. 결국 최종적으로 머리를 쓴 것이 솔방을을 따가지고 가서 솔씨로 번식 시키는 방안이었다.
여행지에서 특이한 식물 종자만 보면 현대판 ‘문익점(文益漸)’이 되어서 여기저기 봉지에 담아 한국에 들여오는 나의 습관은 급기야 지중해 소나무종자를 한국에까지 들여오는데 성공했다. 아파트 베란다의 양지바른 쪽에 푸른 솔방을을 한 달 정도 말리고 나서야 솔방울에서 적송 씨 보다 조금 크게 성장한 솔씨가 터져나왔다.
그 해 늦은 가을 나는 소중하게 생산해 낸 지중해소나무의 자식들을 옥란재의 양지바
른 산기슭에다 살 자리를 마련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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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沙防)의 날’ 이 처음 제정된 1960년 3월 2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기념식
참가자들이 곡괭이를 메고 민둥산을 오르고 있다.
그리고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게 내리쬐던 다음해 봄날 경이롭게도 어린 솔씨가 하늘로 솟구치는 장엄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고향의 집 옥란재에도 지중해소나무가 넓은 치맛폭을 드리울 날을 꿈꾸면서 나무의 성장을 관찰했다. 총 15주가 3.5cm정도 자랐다. 그 신비스러움이란. 나는 마치 서양문물은커녕 서양의 금발미인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바닷가소년이 백옥색 피부의 금발소녀를 맞닥뜨린 것 같은 충격과 두근거림으로 돋아나는 지중해의 자식을 보다듬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주었다. 겨울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와 달리 영하 수 십도의 이상의 혹한(酷寒)에도 잘 버텨주는 우리 소나무와 다른 삶의 환경을 지중해의 자식들이 잘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겨울 내내 비닐로 몇 겹 보온(保溫)을 해줬고 따사로운 날은 비 닐을 벗겨 탄소동화작용을 할 수 있게끔 도 와줬다.
살추위를 피하고 겨울을 무사히 난 이 소나무가 봄을 맞이했을 때 문제가 일어났다. 9
너무 밀식된 채 촘촘히 자란 솔포기들을 옮겨주려고 모종삽을 밀어 넣었는데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놀라운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종삽을 들어 올리는 순간 소나무 모종의 뿌리가 중간 단계부문에서 다 잘려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의 경험으로는 모종의 크기가 3.5cm정도 되면 뿌리의 깊이는 지표면으로부터 4~5cm를 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 소나무 뿌리는 9~10cm를 이상으로 깊숙이 내려가 있는 것이 아닌가.
모종삽 정도로 떠 낼 뿌리가 아니라 아예 삽질을 해야 온존하게 캐어낼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는 비로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을 사전(事前)에 인지(認知)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삶의 풍토 즉 환경조건과 문화가 달랐던 것이다. 지중해성 기후는 겨울은 습하지만 춥지 않고 여름은 고온 건조하다.
지중해를 여행할 때 마다 늘 보는 풍경이지만, 해안가를 차지하고 있는 오렌지나무,
포도나무 , 올리브나무 등 과수나무는 대개가 봄과 여름에 성장한다. 밀 보리 등 초본류(草本類) 농작물도 이 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지만, 강수량(降水量)이 절대 부족한 이 지역에서는 과수(果樹)농업이 유리하다. 표토(表土)가 일찌감치 말라버리기 때문에 10cm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초근류(草根類) 농작물은 재배가 어렵다.
수 천년동안 이 기후 속에서 자라온 지중해의 소나무들이 생존을 위해 축적된 삶의 지 혜가 솔씨의 유전적 형질 속에 담겨져 온 결과다. 이른 봄 씨앗이 발아(發芽)되면 곧 다가올 마르고 척박한 죽음의 여름을 대비하여 땅 속 깊숙이 물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곳으로 달려가야만 하는 조상들의 지혜가 DNA속에 축적(蓄積)됐기 때문이다.
씨앗들은 사할린의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돼왔듯 멀리 강수량이 풍부한 한국 땅으로 강제 정착된 것도 모른 채 생존을 위해 비정상적(?)으로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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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지중해의 소중한 자식들은 옥란재에 와서 2년도 못 넘기고 생을 마감했다. 뿌리를 뻗는 것은 나무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행동이고 생존경쟁의 첫 단계다. 뿌리는 땅속의 많은 수분을 쉴 새 없이 빨아들인다. 수분은 나무의 체관부(체관, 사부 유조직, 사부 섬유, 반세포로 구성된 복합 조직. 물질의 통로가 된다)를 통해 가지에서 잎으로 전달된다. 나무는 이 수분을 통해 마그네슘 등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걸러낸다. 영양분은 끌어올린 수분 중 극히 미1968년 식목일 행사 후 박정희 대통령이 소량에 불과하다. 산소와 수증기는 나뭇잎의 경기도 청계산에 리기다 소나무를 심고 있다. 기공을 통해 흡수한 수분이 방출되기 때문에 빠져나온다. 인간에게 유익한 물질인 산소와 피톤치트는 사람으로 치면 일종의 나무의 ‘대변 보기’일 수 있다. 수분을 증발해 내는 증산(蒸散)작용은 나무의 ‘소변 보기’이다. 이 맑게 걸려진 소변이 운무를 만들어내고 비를 만들어 낸다.
아무튼 태양의 빛을 받아들여 광합성(光合成)을 하는 나뭇잎 못지않게 나무에게 있어 뿌리는 생명의 모태다. 그런데 앞서 예시한 지중해소나무의 경우처럼 나무마다 뿌리 뻗는 방식이 다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중 아카시아나무의 뿌리 뻗기 방식은 아주 특별하다. 표토 깊숙이 뿌리를 박는 다른 나무와 달리 콩과식물의 특징을 간직한 아카시아나무의 뿌리는 언제나 얕은 땅속을 거의 수평으로 기어 다닌다. 뿌리 혹 박테리아를 통해 공기 중에 질소를 고정시켜 양분으로 삼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공기와 접촉하는 뿌리 부분에서도 줄기가 될 눈을 만들어 왕성한 맹아력을 만들어낸다. 햇볕만 있다면 순식간에 온 산을 덮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같은 콩과 식물인 오리나무 쉬나무와 싸리나무도 같은 방식으로 식생(植生)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특질 때문에 아카시아나무와 우리의 숙명적 인연이 시작됐음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나무, 그리하여 거름기 11
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낼 수 없는 우리의 황폐해진 민둥산의 주인이 되어 한 때 숲의 지배자가 되었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나무의 일대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카시아나무의 생애 속에는 그 나무가 이 땅에 정착하고 살아온 기간이라고 할 수 있던 파란만장했던 한국의 산업화(産業化)시기와 얽힌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역사의 숨은 산 증인이 아카시아나무다.
박정희가 나무를 심기 시작하다
옥란재는 남양만의 작은 옛포구 왕모대를 낀 자그마한 농촌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변변한 우마차(牛馬車) 길조차 없었던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5년이었으니 1960년대 당시의 낙후된 사정을 어찌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 있을까.
인구가 밀집한 근기(近畿)지방, 특히 야트막한 야산을 끼고 있는 마을근처의 산들은 시뻘건 황토 산이었다. 서해안지방의 토양의 색깔이 빨간 것은 철분 함유랑이 매우 높은 토질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의 강점기간 동안 우리의 산림은 아주 심한 약탈에 시달렸다. 목재가 될 만한 나무들은 다 베어져 나갔고, 심지어 태평양전쟁 말기에 연료가 부족했던 일제는 우리 소나무의 관솔(송진이 굳어진 나뭇가지)까지 징발해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나무 관솔을 채취하던 기억을 동네 어른들은 긴긴 겨울 밤 술 안주삼아 되풀이해서 들려주곤 했다.
그 때는 집집마다 군 불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저녁 무렵 굴뚝위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이 목가적(牧歌的)이었던 그 때의 기억 뒤편으로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온 산에 여기저기 숨어서 나무하던 나무꾼을 쫒던 경험이다. 주인이 있는 나의 집 뒷동산은 송충이 피해를 보기 전 아름드리 조선소나무가 잘 자라고 있었지만, 소위 적산(敵産)으로 불리던 당시의 임자 없는 산과 동네에서 좀 떨어진 우리 집 소유의 야산은 밥 지을 땔감조차 없었던 가난한 나무꾼들의 등쌀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나무꾼들은 적산의 풀 한 포기조차 낫으로 베고 갈퀴로 베어갔다.
12소나무에서 떨궈진 솔가래(솔가리의 방언. 말라서 땅에 떨어져 쌓인 솔잎, 또는 소나무의 가지를 땔감으로 쓰려고 묶어 놓은 것)는 솔잎에 함유한 솔기름 때문에 참나무 가랑잎보다 인기가 높은 땔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뒷동산에 올라가면 솔가래를 누가 다 긁어가고 맨숭맨숭한 땅의 맨얼굴이 들어난 경우도 한 두 번은 아니다.
겨울날 가난한 농부의 아이들도 졸망한 망태기를 짊어지고 솔가래를 긁으러 다녔다. 긁어갈 솔가래가 없어지면 다음은 나무 등걸을 도끼로 찍어내 캐어갔다. 생나무는 물론, 억새풀, 솔가래, 가랑잎과 토사를 그나마 지탱해주는 죽은 나무 등걸까지 다 캐어간 고향의 야산들은 오랜 수탈에 못 견디며 죽어갔다. 낙엽과 솔가래가 썩어야 비료가 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데 모조리 걷어가 버리니 산림은 몽땅 피를 뽑아간 중병(重病)환자의 몰골처럼 처참했다..
장대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우리 마을의 논밭은 온통 뻘건 황토 물로 그려진 흉흉한 수채화(水彩畵)로 남았다. 적어도 내 어린 기억 속에 우리 동네의 풍경이다. 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을 잡아주는 저장고인 숲이 사라지니 토사가 논으로 밭으로 몰려오기 일쑤였다. 우리 집 모퉁배기 논은 언제나 장마철이면 논의 절반이상을 토사가 삼켰다.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불리는 한반도는 일제의 집요한 목재수탈과 해방의 혼란기를 이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전체 산림면적 670만ha의 3분의 1 가량이 나무
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가로지르던 국토의 모습이다.
미국의 토양보존학자 리치 콜더박사는 수 천년에 걸쳐 만들어진 산림도 사람이 잘못 취급하면 몇 달 사이에 사막으로 변하며 그 사막을 다시 산림으로 복구시키려면 수 천년이 걸린다고 했는데, 그 당시 우리 동네 야산의 모습은 사막과 다름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승만(李承晩)정권 시절에도 산림녹화사업은 이루어졌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정부는 남한 산림면적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105만 ha의 산림에 28억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가속도를 더해가며 황폐해지는 우리의 산림을 본래대로 회복시킨다는 것은 이 정도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우리의 주인공인 아카시아나무를 비롯해서 리기다소나무, 오리나무로 사 13
1975년 4월 경북 영일군 사방사업장을 시찰한 박정희 대통령이 관계자들에게 지시를 내리 고 있다.
방림(砂防林 ; 황폐한 산지를 사태방지용 수종과 초류를 심어 복구시킨 산림)을 조성하는 사업이 1967년경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 산림복구정책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나온 사람도 역시 박 대통령이다. 고향집에서 내가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던 시절인 1967년 한 해 동안에만 총36만 5천여ha의 엄청난 면적에 조림이 이루어졌다 (<산에 미래를 심다>, 이경준 著.서울대학교 출판부.2006년).
지금도 나는 그 때의 구호를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않고 있다. ‘치산녹화(治山綠化)’ ‘절대녹화’ ‘절대입산금지’ 등 내 남루했던 어린시절을 풍미했던 관제(官製)표어들을 외었을 정도면 산림녹화가 얼마나 강렬했던 당시의 과제였던 가를 짐작하게 한다. 민도(民度)가 낮고 응집력이 떨어졌던 사회에서는 얼마간의 강제가 동원된 정책은 나름대로 효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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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중학생 할 것 없이 수업시간을 빼먹어가며 우리는 면사무소에서 배당된 회초리같은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 묘목(苗木)을 들고 이 산 저산을 누볐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구호(救護)식량이 어른들에게 주어진 대가(代價)였는데 거의 부역(負役)이나 마찬가지로 불려 다녔다.
문맹률까지 높았던 우리 동네의 농민들은 당면한 연료부족과 곤궁한 삶 때문에 ‘산림부흥 속에 나라의 미래가 담겨있다’는 식의 당시의 관제 구호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산림감시원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여기저기 눈을 부라리고 있는 가운데서도 사방림에 심어진 1년 남짓한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가 연료용으로 절취당하는 일도 잦았으니까. 우리 집 소유의 또 다른 야산은 1967년부터 1970년 사이에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로 피복(被覆 ; 거죽을 덮어 씌움)됐는데 비만 오면 황토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낸 곳에 심겨진 나무도 거의 아카시아나무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가 말했듯 ‘일본놈’들이 심은 것이 아니였다. 우리가 심었다. 나도 고사리 같은 어린 손으로 수백 그루의 아카시아나무를 이 산 저산을 옮겨 다니며 심었다. 손마디가 아카시나무의 가시에 긁혀 피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이 ‘좋다’는 나무를 박토(薄土)에 꽂고 다녔다.
동네 어른들은 왜 이 가시 많은 나무를 심어야하는지 이유를 잘 몰랐다. 어떤 식물도 자리기 힘든 땅에서 과연 이 나무가 자랄 수 있을까 의문도 있었지만 그건 무지몽매한 초등생인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닌 듯싶었다. 오리나무, 아카시아나무, 리기다소나무. 이 세 가지 사방조림용 나무는 고향의 물과 불과 흙과 공기처럼 내 무의식속에 드리운 그림자가 되어 지금도 고향집, 옥란재와 연관된 숱한 기억 속에 살아있다 (나무들이 한 인생의 무의식까지 지배해가는 힘의 오묘함이라니).
굴러온 나무가 숲의 권력을 넘보다
아카시아나무는 도대체 어디서 온 나무일까.
해마다 5월의 화창한 봄날을 수놓는 아카시아나무는 ‘아까시’나무라고 불러줘야 맞다. 원래 아카시아(Acacia)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는 열대지방에 관목(灌木 : 키가 작고 15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며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나무. 무궁화, 진달래, 앵두나무 따위. 떨기나무)상으로 자라는 상록수(常綠樹)다.
우리가 지금 아카시아나무라고 부르는 나무의 정확한 이름(학명․學名)은 ‘로비니아 수도 아카시아’(Robinia Pseudo Acacia)다. 라틴어로 ‘가짜 아카시아 나무’라는 뜻이다. 산림청과 학계에서는 진짜 아카시아나무와 구별하게 위해 ‘아까시’나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식물학자들이 이구동성 세계 공통으로 쓰는 학명과 국제식물명명규약이라는 것을 들이대고 ‘너희들 맘대로 못 바꿔’라고 해도 사람들은 한번 잘못 각인된 친숙하고 정감어린 이름을 버리지 못한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부르던 아카시아 꽃 동요의 노래 말을 기억 속에서 깡그리 지워내지 못하는 한 ‘아카시아’라는 나무이름을 쉽게 버리지 못함을 고백한다.
동구 밭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실바람이 솔바람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없네 얼굴 마주보고 방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옥란재 뒷산을 횡(橫)으로 가로지르면 큰 규모의 우리집 복숭아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과수원길 좌우에는 풍경화의 한 폭처럼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나는 아직도 아련한 감정에 복받치며 이 동요(童謠)를 부른다. 이따금 고향의 옛집에서의 모든 기억들이 뒷걸음치며 멀어져갈 때, 나는 멀어져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붙들려는 몸부림으로 이 노래 가사를 흥얼거린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새하얀 아카시아 꽃 위로 그윽한 꽃향기와 함께 꾀꼬리 울음소리가 얹혀 질 때 느끼는 몽환적 풍경화의 장면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사람들이 끝까지 아카시아나무라고 고집하며 부르는 것은 나의 경우처럼 순전히 정서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녀석들의 원산지는 일본이 아니라 북미(北美)캘리포니아로 알려져 있다. 1897년 인 16
천공원에 처음으로 식목됐고 일제 치하 데라우치 조선총독 시절에 중국으로부터 아카시아 묘목을 들여왔다는 이주사의 기록이 있다. 일제가 처음 심은 것은 맞지만 일제가 한반도 강산을 망치려고 작정하고 심은 것이 아니라 황폐한 산림을 복구하는데 효용성을 시험해보는 단계였다.
한반도 특히 당시 조선 말기부터 민초(民草)들의 삶은 피폐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세도(勢道)정치와 지방관들의 학정(虐政)에 민란(民亂)이 빈발(頻發)하고 산업화를 진전시킨 서구열강의 침입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자 우리의 산림도 통제를 상실했다.
한 번 망가진 숲을 되살리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가는 앞서 서술했던 바다. 민가(民家)가 많이 모여 있던 근기(近畿)지방의 야산은 이 때부터 몸살을 앓았다. 우선 복구의 필요성에 제일 먼저 구원투수로 주목받았던 속성수(速成樹)가 바로 우리의 아카시아나무였던 것이다. 악의적(惡意的) 의도에서 일제가 우리 강산에 심은 나무가 절대로 아니다.
1960년과 1970년대 초까지 박정희 대통령은 산림복구의 피눈물 나는 열정을 쏟았다. 당시 산림청장의 위세가 웬만한 장관 못지않았음을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노력의 여파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이 발표되는데 10년간 100만ha에 조림을 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아카시아나무, 리기다소나무, 이태리포플러나무 등과 같은 속성수와 밤나무 같은 유실수(有實樹)를 7대3의 비율로 식재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동네 황토야산들은 사방공사 이후에 조금씩 산림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이 기간 동안 품종이 개량된 아카시아나무도 출현됐다. 이른바 가시 없는 ‘민둥 아카시아나무’와 잎이 4배체 넓은 ‘광엽(廣葉) 아카시아나무’다. ‘민둥 아카시아나무’는 무시무시하게 돋아나는 가시를 없애 산림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산림학자들이 연구해 낸 산물이다. 넓은 잎 아카시아는 잎이 보통 아카시아의 두 배 이상 크고 단백질 함량이 높아서 농촌의 염소나 토끼 녹사료(綠飼料. 뭇먹이. 식물이 싱싱할 때 베어 만든 가축의 먹이)로 인기가 높았다.
수원까지 나가서 아버지가 얻어온 이 묘목을 애지중지 키웠던 기억이 난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농업이 생산의 전부였던 당시의 산업구조를 개선하고자 연이은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산업화의 시동을 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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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아카시아 나무가 절경을 이룬 남한산성 입구. 아카시아가 우리 산을 지배하던 것도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불모(不毛)의 한국경제는 산업화의 큰 기치를 내걸었지만 갈 길이 너무 멀고 막연했다. 연료채취로 만신창이가 된 산 위로 세찬 비(외부적 재앙)가 내리면 식생(植生)의
자양(滋養 ; 몸의 영양을 좋게 함)이 될 양분들이 모두 깎여 내리듯 우리의 경제도 전란(戰亂)의 폐허 속에 산업자본이 고갈된 상태였으니 긴급 원조물자와 외국의 도움(차관 도입)이 절실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성급하게 한일(韓日)회담을 마무리하고 속성으로 차관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개발독재시대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은 대부분 속전속결(速戰速決)주의였다. 당시의 산림정책 또한 속성수를 도입해 빠른 속도로 녹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었다. 그 속성 18
수의 대표주자가 외래종(外來種)인 리기다소나무 아카시아나무 오리나무 이태리 포플러나무, 산림학자인 현신규(玄信圭) 박사가 개발한 은사시나무 등이다.
속성수의 상징인 아카시아나무는 바로 이런 박 대통령의 다급한 심정을 꿰뚫어보듯 전국의 모든 민둥산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굴러온 나무가 숲의 권력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산사태는 조금씩 방지되기 시작했고 산림은 조금씩 원래의 푸르름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조금씩 세월이 지나면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진리란 늘 옷을 바꾸어 입고 나타난다.
아카시아나무, 독재권력을 휘두르다
민둥산은 아카시아나무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구원투수인 우리의 아카시아나무가 토사유출 걱정이 사라지고 석탄연료의 보급에 힘입어 땔감걱정까지 사라질 때쯤 천덕꾸러기가 되어 나타났다.
어느 순간 어른들은 아카시아나무에게 ‘산림을 망치는 망측한 나무다’라는 고약한 낙인을 붙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1980년대를 들어서면서 산림의 원상회복이 조금씩 이루어지자 숲의 독재자로 자라난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사람들의 원성(怨聲)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것이다.
아카시아나무는 양수(陽樹 ; 어릴 때 햇볕에서는 잘 자라지만 그늘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는 나무)다. 양수는 절대적으로 햇빛을 많이 받아야 잘 자란다. 잎이 햇볕을 마주보며 광합성을 하지 못하면 여간해서 자랄 수 없는 나무다. 소나무 또한 대표적인 양수다. 햇볕이 조금만 있어도 생명을 잘 부지할 수 있는 참나무 등의 음수(陰樹)와 달리 이들 나무는 음수의 기세가 세지면 고사(枯死)되기 일쑤다.
음수와 경쟁을 한다면 필패(必敗)하는 아카시아나무가 왜 어느 순간 우리 산림의 독재자가 되어 숲의 권력을 몽땅 차지하게 되었을까. 아이러니컬하게도 햇빛을 독차지할 수 있고 다른 종(種)의 나무가 여간해서 자랄 수 없는 황폐한 산이었기 때문에 가 19능했다. 또 영양분이 다 사라진 척박한 산에서 기력을 일으킬 나무는 아카시아나무, 리기다소나무, 오리나무 등 몇 종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 산림의 강자(强者)로 거듭난 참나무류는 당시에는 심는다 해도 자라지 못했다. 거기다가 척박한 토양 속에서 콩과식물의 특징 중 하나인 모자라는 양분(질소)을 외부에서 차용해오는 특별한 재주를 아카시아나무는 가지고 있었다. 나무꾼이 가차 없이 줄기를 잘라내도 땅 표토 밑에서 맹아지를 만들어내는 생명력은 놀라울 정도다. 뿌리혹 박테리아가 있는 뿌리는 척박한 산에서 영양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기막히게 알고 있다. 응답이 없는 땅에다가 원조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공기 중에다가 원조를 요청해 질소라는 이름의 차관(借款)을 얻어내는 것이다.
자본이 없이 산업화를 시도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전략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한국경제의 기초를 닦는 것이었다.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그렇게 척박한 토양위에 아무렇게나 심어졌지만 산림을 다시 일으킬 방안을 외부에서 찾는 지혜를 만들어냈다.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순식간에 모든 민둥산을 점령해버린 이 나무는 사람들의 간섭이 없는 곳에서 맹위를 떨쳤다.
옥란재에서 멀지 않은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와 마도면 백곡리에 가면 남양 홍씨(南陽 洪氏) 참의공파(參議公派) 후손인 우리 집안의 묘지가 있다. 40여기가 넘는 이 묘지
는 성묘(省墓)철만 되면 곡괭이 삽 등이 동원된 공사를 해야 했다. 멀찌감치 심어진 아카시아나무가 순식간에 묘지까지 뿌리를 뻗고 내려와 맹아지를 내밀면서 잔디가 죽어갔으니 어른들의 심려가 만만찮을 수밖에.
뿌리는 질기고 단단해서 잘 뽑히지도 않았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풍겨나는 묘한 화학약품 같은 냄새는 역겹기까지 했다. 연례(年例)행사처럼 제초작업과 별도로 아카시아 맹아지 제거작업이 이루어졌다. 잘라낼 수록 오히려 기세를 더해가는 이 나무에 그루터기에 ‘근사미’처럼 강한 제초제를 바르면 맹아가 수그러든다는 말에 성묘 갈 때는 20
늘 제초제가 준비됐다.
뒷산 한 편의 복숭아과수원도 마찬가지였다. 산 쪽에서 밀려오는 아카시아나무 수세에 밀린 과수나무들은 양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과수나무들이 비실거리는 것을 본 나의 아버지는 어느 날 일꾼을 여럿 사서 산림을 덮고 있는 아카시아나무 제거작업에 들어갔다. 헛수고였다. 그 다음해에 더 굵은 가시를 내밀며 용솟음한 아카시아나무의 무리 앞에서 아버지는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아카시아나무를 자를수록 사방공사로 심어진 오리나무와 리기다소나무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가 애써 키운 이들 묘목까지 전멸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청년기의 아카시아나무가 자라는 산에서는 다른 나무들의 생존이 불가능했다. 끝없이 돋아나는 맹아력 때문에 절대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 식생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산밭을 일구며 살던 농민들이 겪는 아카시아나무의 피해는 더욱 심했다. 농민들은 아카시아나무를 하루속히 퇴츨 시켜야 할 수종으로 결론지었다. 소위 ‘나쁜 나무’(?)와 사람들의 전쟁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아카시아나무를 심기시작한지 10여년 만에 벌어진 세상인심의 변화다.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 할아버지처럼 나도 산에 지게를 지고 올라가면 우선 아카시아나무부터 낫으로 찍어냈다. 없애지 않으면 이 기세가 리기다소나무 숲까지 처들어 올까봐 걱정되서다. 어느 이른 봄날 우리 집 일꾼 용생이 형과 나는 지게를 지고 하루 종일 나무를 했는데 모두 가죽장갑을 끼고 톱질로 자른 나무가 몽땅 아카시아나무다. 얼마나 많이 잘랐는지 그 날 밤에 가시를 덮어쓴 아키시아나무 귀신이 꿈속에
나타날 정도였다. 또 겨울철 이파리를 다 떨구고 흉측한 가시만 남아 위엄을 떨구는 아카시아나무 숲은 원시적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른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심은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아카시아가 자신들이 심기 전에도 있었다는 것과 그 도입시기가 일제 시대였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애증으로 얼룩진 아카시아나무를 향한 상상과 추측이 부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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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제가 하필이면 이 지독한 나무를 한반도에 들여왔을까?’ 자연과학적 상식과 토양학, 산림생태학을 공부해보지 못한 시골사람들은 급기야 ‘일제 산림초토화설’을 만들고 기정사실화했다.
나쁜 나무를 향한 미움의 화살이 일본제국주의자들로 향해 꼿히는 바람에 이 나무를 온 강산에 적극 심게 했던 진짜 주인공인 박정희 대통령은 구설수(口舌數)를 피했다.
일제 때문에 구설을 피했다는 것이 맞는 답일까. 나는 좀 색다른 생각을 한다.
아카시아나무가 왕성한 발육을 하던 시절은 1970년대 초반이다. 황폐한 숲을 푸르게 했지만 결국 그 숲의 권력자가 된 아카시아나무의 행태는 어쩌면 박정희 대통령을 닮아있다. 독재와 파쇼권력으로 숲을 지배하기 시작했으니까. 197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3선(選) 개헌(改憲)을 마무리하고 유신(維新)독재로 넘어가던 시절이다. 대통령과 닮은 아카시아나무를 비판한다는 것은 긴급조치 위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시골어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지.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던 시절 ‘일본놈 탓’이라고 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카타르시스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의 뇌리에까지 이어지는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과 상식은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이와는 반대로 아카시아나무가 심어진지 10여년 이상 지나면서 보이지 않는 숲의 토양에서는 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카시아나무가 죽은 토양을 회생시키다.
장마철에도 우선 토사유출이 없어진 건 물론이거니와 거름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땅에 유기질 양분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먼저 박테리아의 도움으로 토양에 질소가 풍부해졌다. 가을에 떨구어 내는 아카시아 낙엽은 오리나무, 싸리나무 등 콩과 식물 이파리의 특징처럼 또 아주 쉽게 분해되어 토양 속에 몸을 섞는다. 유기물이 스며든 토양에 많은 미생물과 버섯 등의 진균류(眞菌類)가 서식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미생물과 뿌리에 붙어 공생(共生)하는 진균류는 서로 유기적(有機的) 공동체의 역할을 한다. 건강한 산림은 이런 유기적 관계가 22
형성될 때 가능하다.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나는 숲에 형성된 진균류의 균사(菌絲)그물망은 나무뿌리에 물과 영양분을 공급해준다. 진균류의 도움이 없다면 나무뿌리는 주변의 광물질(鑛物質)만으로는 그런 수분과 영양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균사들은 나무뿌리에 비해 흙에서 인(燐)이나 질소 같은 중요한 영양분을 뽑아내는 데 더 유리하며 당(糖)을 얻는 대가로 영양분을 나무에게 준다 (<나무와 숲의 연대기>, 데이비드 스즈키, 웨인 그레이디 著, 김영사. 2005년 8월). 균사는 흙 속에서 질소를 분해하고 벌레를 죽이기도 하며 벌레의 몸에서 미량원소를 흡수하기도 하는 효소를 분해하는데 이 효소 역시 나무에 전달된다.
아카시아나무가 경쟁자가 없는 황폐한 토양 위에서 권력을 확장시키며 만들어낸 숲에는 비로소 참나무,팥배나무, 밤나무,때죽나무 등 다른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 적정 환경이 조성된다. 경이롭게도 10년 20년 된 아카시아 나무숲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어린 팥배나무, 참나무, 음나무, 산벚나무 묘목들이 희망처럼 자라났다.
물론 아카시아 이파리의 그늘에 가려 광합성을 제대로 못한 이 나무들의 생장(生長)은 정말 보잘 것 없을 수밖에 없다.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카시아나무들이 박토를 기름지게 만들기 전에는 이 안타깝도록 애처러운 삶조차 참나무류의 나무들은 꿈도 꿀 수없는 일이었다.
다른 수종과 비좁은 땅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아카시아나무에게는 귀찮고 고역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이 모두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인과(因果)의 결실이었다.
숲은 비옥해졌고 20년 이상의 아카시아나무 숲 바닥에는 눈에 보이는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났다. 초본과 식물이 돋아나자 토양미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이 돌아왔고 개구리, 두꺼비, 뱀 등 파충류(爬蟲類)가 따라왔다.
그러나 이것은 아카시아나무에게 해를 끼치는 변화가 아니다. 유기적 생명공동체로서의 산림 본연의 생태가 회복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곤충과 동물은 산소로 호흡하고 23
탄소를 뺃어 낸다. 나무는 거꾸로 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만들어 공기 중에 뿜어준다.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이 정 반대다.
동물은 땅위에 자신의 배설물을 뿌리고 나무는 대소변을 공중에 날린다. 동물의 배설물은 땅속에 분해되어 나무의 영양분이 되고 나무의 대변인 산소를 포함한 피톤치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호흡을 이롭게 한다. 끊임없는 증산작용이 운무로 피어올라 비를 내린다는 것은 이미 앞에 서술한 바 그대로다.
비는 모든 생명의 윤회(輪廻)를 만들어 내는 원천이다. 이로서 숲은 본래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카시아나무가 그의 벗들인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와 함께 헐벗은 민둥산에 들어와 살림을 시작한지 어언 40~50년. 우리나라의 모든 산들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생태(生態)의 복원(復原)을 이루어냈다. 산림의 ‘압축 고도성장’을 이루어낸 것이다.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 은사시나무, 리기다소나무로 인공 조림(造林)된 고향의 모든 야산도 이제는 다양한 식생들이 눈에 띄게 번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순간에 망쳐진 산림을 30~40년만에 기적같이 복구한 우리의 실력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산림정책 리더십과 압축성장을 가능하게 한 아카시아나무의 공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청년기(靑年期)를 지나 장년기(壯年期) 이후로 성장한 아카시아나무에게도 근심거리가 생겨났다. 숲의 민주세력들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숲의 민주세력들이 성장하다.
겉보기에는 완벽할 정도로 숲을 지배하는 독재권력을 완성했지만 나무사이에서는 훗날 권력을 위협할 새로운 세력이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다. 드리운 가지 사이로 겨우 비집고 들어오는 손바닥만한 작은 햇볕을 양분삼아 자라나던 어린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산벚나무 등이 키를 키우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아카시아나무의 근심은 불안으로 바뀌어갔다.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어느 날 자신의 그늘 밑에서 묵묵하게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이 녀석들의 아우성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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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나무만 숲을 차지하는 것은 ’생물다양성 공존의 원칙‘에 위배 된다’
‘최소한의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햇볕을 더 달라’
처음에는 광합성을 보장해 달라는 식의 ‘최저생계비보장’의 요구로 시작됐다. 이후 몸집이 조금 커지자 구호가 ‘숲의 민주화요구’ ‘아카시아나무 독재타도’로 바뀌어갔는데 아카시아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들을수록 원통하기 짝이 없고 기가 찰 일이었다.
아카시아나무가 민둥산을 녹화하기 시작하기 전에는 참나무류의 낙엽활엽수들의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동안 외부로부터 양분을 얻어오고 자신의 이파리를 떨구며 일궈놓은 비옥한 토양이 있었기에 정착이 가능했던 어린나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물러나라’는 야유를 듣다니 적반하장의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숲은 아카시아나무들의 탄압과 새로 등장하는 음수들의 각축으로 한 바탕 소리 없는 전쟁을 치룬다.
그렇게 30.40년이 지나면 아카시아숲은 숲의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거목들이 등장한다. 민주화의 영웅들은 참나무류가 제일 많다. 참나무 류는 온대림 숲의 천이과정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는 나무다. 햇볕을 좋아하는 양수 류가 토양을 비옥하게 해주면 음수들이 자리를 잡고 결국 양수를 척박한 땅으로 밀어낸다. 참나무 류는 일조량이 부족해도 잘 자랄 수 있다. 이 인고의 상징수가 결국 숲의 민주회세력의 거목으로 자라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옥란재 뒷산 아카시아나무가 무소불위의 맹아지를 만들며 무성했던 숲에 가보면 40년 긴 세월동안 나무들의 투쟁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이 혈전(血戰)의 땅은 나와 우리집 일꾼이었던 용성이 형과 무수한 땔감을 베어내던 공간이다. 70년대 초 베어도 베어도 다시 솟아나온 맹아지에 지쳐 용성이 형과 나는 그 지역을 아카시아 밭으로 팽겨쳐 놓았다. 아버자와 우리 식구들은 모두 이 골짜기를 ‘아카시아밭’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많던 아카시아 나무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새 아름드리로 자란 나무들은 대부분 비바람이 몰아칠 때 혹은 태풍을 따라온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 쓰러졌다. 천근성(淺根性) 나무이기 때문에 땅속에서 지탱하는 힘이 약해 쓰러지는 경우가 대부분 25
이다. 오랜 인고를 견딘 참나무 류의 나무들이 하늘을 치고 나오면서부터 거꾸로 그늘에 가리워져 광합성을 못해 영양상태가 나빠진 원인이 작용한다.
빈약하기 그지없던 가느다랗고 긴 몇몇의 음나무와 상수리나무 졸참나무가 아카시아나무 군상의 탄압을 뚫고 하늘로 삐죽 솟구쳐 나오는 순간 양수의 운명을 타고난 나무의 시련은 시작된다. 참나무의 맹위를 아카시아 나무는 당해 내지 못한다.
햇빛이 모자라면 뿌리의 활동도 소강상태로 돌아가고 나무는 연약해 질대로 연약해진다.
양천구 신정동에 가보면 신투리 야산자락에 무수한 아카시아나무 군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척박해진 야산 녹화용으로 70년대 심은 나무가 성장해서 5월이면 매혹적인 향기를 일대 아파트주민들에게 선사한다.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면 여기저기 아카시아나무가 전복되어있다. 그리고 그 옆에 거대해진 몸통을 꼿꼿하게 세우고 우람하게 자란 참나무 류를 발견할 수 있다.
남산에서 보듯 아카시아나무가 쓰러진 옆에 거목으로 자란 벚나무는 사람이 심은 것이지만 참나무는 사람들이 심지 않은 나무다. 숲의 독재 권력인 아카시아나무에 대항해 무수한 탄압을 견뎌오다가 자신의 힘으로 하늘로 몸 한 가지를 고추세운 순간 참나무 류는 새로운 숲의 주인이 된다.
우리 집 아카시아나무 밭에는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꽃을 피우는 큰 아카시아나무 수 십여 그루와 참나무 류인 상수리나무와 음나무 일본목련나무 팥배나무, 때죽나무, 쪽동백나무, 밤나무 등이 어울려 어깨동무하며 살고 있다. 그 중 초기에 아카시아나
무숲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공헌한 두 나무가 있는데 아름드리로 자라난 졸참나무와 상수리나무다.
나는 지금도 옥란재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졸참나무는 ‘김영삼 전대통령나무’이며 상수리나무는 ‘김대중 전대통령나무’가 아닐까 라고 소개한다.
이 두 나무들이 아카시아나무 밭에서 견뎌온 신산의 세월을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 26
으랴. 음지에서 잘 견디는 힘. 즉 음수로서 인고하는 각별한 능력은 아카시아나무의 모진 박해와 탄압에도 마지막 승리의 깃발을 올리게 했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결국 이 나무들의 성장과 승리의 역사도 아카시아나무가 이루어놓은 토양 위에서 쓰여 졌다는 사실이다.
60년대와 7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심어졌고, 산림녹화에 이바지한 우리의 아카시아나무의 전성기는 산업화를 추진하던 박정희전대통령의 시대와 우연하게 일치한다. 3선개현과 유신독재의 칼날은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아카시아 나무의 맹아력과 줄기에 붙은 무시무시한 가시와 비유해도 낮설지 않다. 그리고 척박한 민둥산을 비옥하게 만들고 경제발전을 통해 빈곤을 퇴치한 업적까지 닮아있다.
이런 아까시아나무를 많은 사람들이 ‘나쁜 나무’라고 불러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박정희 전대통령을 ‘나쁜 대통령’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유신독재의 폐해를 논할 수는 있지만 그가 그렇게 해서 이룩한 근대화라는 업적까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카시아나무의 일생은 박정희전대통령의 생애와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있다.
박정희와 함께 출현해서 사라져가는 박정희를 닮은 나무
아카시아나무는 권력의 시작부터 권력의 종말까지 박전대통령의 모습을 따라갔다.
박정희처럼 우리의 아카시아나무의 본격적인 등장도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림이 헐벗던 시절이었다.. 해방이후 한국사는 경제적 궁핍과 이념대립의 역사다. 남남 분열과 초기 정부의 무능까지 겹치면서 국민의 실생활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국전쟁이후 대한민국은 모든 생산을 농업에 의존했다. 가난의 대물림은 계속됐고 사회정치세력은 무질서하게 대립과 반목을 거듭했다.
무질서와 혼란이 일상화된 한국사의 한 귀퉁이에서 불쑥 가시(총구)를 내밀며 삐져나온 세력이 박정희 군부 구테타 세력이다.
27아카시아나무 역시 혼란한 시기에 시뻘건 나신만 겨우 드러낸 채 죽어가는 한국의 민둥산에 그 큰 가시를 내밀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5.16구테타 주동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겨 버렸듯 아카시아나무에게 헐벗은 산의 운명을 맡기게 된 전말도 닮았다.
자포자기로 무력해진 산야에 강력한 무기를 들고 등장한 아카시아나무는 무엇보다 자비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무다. 어린 조선 소나무가 조금이라도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면 가차 없이 맹아지를 내고 밀집한 줄기로 고사시키는 일도 마지않는다. 초기 사방용 나무로 심어진 오리나무숲도 아카시아나무와 경쟁을 하면 초토화되기 일쑤다. 동시대에 같은 목적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오리나무 리기다나무 은사시나무는 경쟁을 하면 아카시아의 파쇼적 완력을 당해내지 못한다.
구테타 세력 중 일부가 박정희에 의해서 밀려난 것처럼 아카시아나무는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기회를 엿보는 다른 나무를 향해서 절대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참아라. (언제일지 모르지만)훗날 너희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희생을 강요하며 똑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것도 같다.
초기 아카시아나무 숲에는 이따금 새들이 멀리서 열매를 먹고 날아와 배설을 한다.
팥배나무, 산 벚나무, 때죽나무, 음나무 등의 열매는 새들의 좋은 먹이감이다. 이 열매는 새들의 소화기를 거쳐나가면서 산화처리되어 씨앗으로 땅속에 묻히는데 발아율이 매우 높다. 그러나 초기 산림녹화 드라이브를 건 아카시아나무 숲은 이 조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직 토양이 복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빽빽하게 돋아난 어린 아카시아가 드리우는 그늘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가시를 드리운 아카시아 숲에는 동물조차 드나들기 쉽지 않다. 박정희시대가 그랬다.
그러나 자라나는 아카시아 숲은 박전대통령의 근대화계획처럼 산림의 미래를 위한 치 28
밀한 준비를 한다. 공언한대로 산림을 비옥하게 하고 다른 나무들과 함께 내일을 열기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선 홍수 때 토사를 막아주는 뿌리 그물망을 촘촘히 한다. 이 산림복구의 첫 단계로 아카시아나무가 펼친 ‘민둥산의 새마을 운동’은 빠르고 강력한 나무의 생명력에 힘입어 큰 효과를 본다. ‘살기 좋은 새마을’을 향한 박전대통령의 강한 통치력이 농촌마을의 근본적 생활환경을 변화시켰던 것과 같다..
산림을 부흥시키는 방법도 박정희의 방식을 닮았다. 앞서 설명한대로 산업화과정에서 부족한 자본을 일본과 미국에서 얻어다 쓰는 방법처럼 아카시아나무도 부족한 양분을 외부에서 얻어다 썼다. 박정희가 다져낸 한국경제의 초석은 외국의 원조와 차관이 바탕이 됐다. 우리의 아카시아의 뿌리는 땅속에서 찾을 수 없는 양분을 공기 중에서 차용해 쓴다. 이 공기가 빌려준 ‘질소라는 차관’이 토양을 살리는 원천이 된다. 나중에서 안 일이지만 박정희는 끌어온 외국자본의 힘으로 결국 민족자본화를 촉진시킨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 방식과 아카시아나무의 산림 옥토화 전략은 기가 막히게 닮았다.
산이 비옥해지면서 날로 강해지던 아카시아나무 숲에는 여러 가지 위협요인들이 등장한다. 생태계가 복구되면서 아카시아나무가 살던 토양에 미생물 ,진균류 , 초근류, 곤충, 파충류 등 다양한 생명이 깃들자 다른 나무들(음수)도 살아나갈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음수의 숙명처럼 초미량의 빛밖에 얻을 수 없는 삶이란 처연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같은 시기 박정희의 강력한 산업화정책 덕분에 빈사상태의 한국경제는 기초를 다져간 반면 열악한 도시근로자들의 절망적인 삶 또한 표면에 드러났다. 청계 피복공장 근로자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고개를 들기 시작한 노동과 인권운동은 아카시아나무가 직면한 위협과 닮았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던 참나무류의 음수 몇 그루는 아카시아나무의 탄압에도 잘 견디며 거목으로 자라난 박전대통령의 정적 야당 정치인을 연상시킨다.
거센 외부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박정희는 3선개헌 , 유신헌법 선포 등 초강경 무리수를 두는데 아카시아나무 또한 자신이 혼신을 다 바쳐 만들어놓은 비옥한 토양위에서 29
자라난 정적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통을 키우고 가지를 무성하게 하여 음수에게 줄 빛을 막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수 십년이 지나면 비옥해진 토양과는 달리 아카시아나무는 거꾸로 생장동력이 떨어진다. 박전대통령의 권력 또한 너무나 많은 도전과 위협 속에서 무수한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마사태가 일어났을 때 , 측근 권력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의 때가 갔음을 직감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 경제개발계획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전후 초토화된 한국경제를 세계 속으로 진입시킬 토대를 만들어낸 그였지만 자신의 때가 끝나는 것을 예측 못한 점도 똑같다. 정말 기이한 것은 우리의 아카시아나무의 운명이 박전대통령의 종말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물론 참나무 류가 강성하게 자라나 끊임없는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지만, 적은 종(種)을 달리하는 다른 나무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의 키워주고 지켜왔던 그리하여 늘 권력의 동반자라고 태산같이 믿고 있던 바람과 비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바람과 비가 변덕을 일으킨 폭풍우였다고 할까. 천근성으로 뿌리를 내리는 아카시아나무는 수 십 여년이상 자라면 뿌리의 취약성으로 땅위에서 몸을 지탱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권력, 특히 독재 권력이 오래될수록 취약해지는 것처럼 오래된 아카시아나무일 수록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 여기저기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정치적 적들(음수)의 위협에 약화 될 대로 약화 됐음을 안 측근, ‘바람과 비’가 어느 날 기회를 틈타 우리의 거대한 아카시아나무를 향해 ‘빠아앙-’ 저격한 것이다. 이 배반의 저격 현장을 나는 옥란재 뒷산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뒷산 골짜기 ‘아카시아밭’에는 총격을 받아 누워있는 여러 그루의 아카시아나무를 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아카시아밭이 아니다. 다양한 식생들이 사이좋게 분포되어있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숲이다. 물론 김영삼나무와 김대중나무로 명명한 거목들도 만나 30
볼 수 있다. 숲의 산업화를 일궈낸 위대한 아카시아나무가 차지하던 넓은 하늘에는 어느덧 다른 입주자들이 자리를 잡고 치열한 광합성 경쟁을 하고 있다.
아것도 지나가고 저것도 지나간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별하길 좋아하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좋은 사람은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이다. 나쁜 사람 또한 자기한테 잘못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게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모여살기 보다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이 모여 산다. 나무들도 이런 나무 저런 나무가 모여 생명공동체인 숲을 이룬다. 나쁜 나무라고 잘못 알려진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필요한 시기에 우리에게 와서 제 역할과 소임을 다하고 때를 다한 생명체일 뿐이다.
이 과정을 산림과학자들은 숲의 천이(遷移)과정이라고 부른다. 아카시아나무의 꽃에서는 우리나라 전체 꿀 생산량의 대부분을 생산해낸다. 정부도 이런 양봉업의 생산성(사실은 양봉업은 꿀 생산만 뿐만 아니라 농작물 결실에도 공헌을 한다)을 감안해서 양봉농가들의 요구인 아카시아나무를 심자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양봉업을 육성하여 꿀과 기타 봉산물 생산량을 2008년 기준 3500억원에서 2015년 목표 7000억원까지 늘리는 것이 정부 정책으로 발표됐으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카시아나무를 국유림 등에 다시 심겠다는 정책당사자들의 발상은 돌고 도는 숲의 이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이것도 지나가고 저것도 지나간다. . 먹고살기 힘든 시절의 다수확품종으로 온국민의 사랑을 받던 통일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시간은 환경의 변화도 몰고 오고 사람의 생각도 바꾼다.
양수의 운명을 타고났고 박토에 뿌리박고도 공기 중에서 양분을 끌어오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사방용으로 전국에 심어졌던 우리의 아카시아나무 또한 세상의 변화 앞에서 예외 일 수 없다. 자연의 명령인 숲의 천이과정 안에서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화려했던 지난날의 기억을 접고 남은 생을 정리해야할 때를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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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숲은 소나무와 같이 햇볕을 많이 요구하는 양수들이 터를 잡는다. 그 소나무 숲에도 세월이지나면 참나무류를 비롯 낙엽활엽수들이 세를 든다. 언제인가 비교적 그늘을 잘 견디며 지속적으로 자라나던 낙엽활엽수들이 하늘을 장악하면 성장이 느린 소나무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결국 이 숲의 천이과정에서 최후 승자는 참나무 종인 신갈나무다. 북한산 등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비옥해진 골짜기 쪽에 자리 잡았던 소나무들이 사라지고 낙엽활엽수림대가 독차지한 것을 보게 된다. 아카시아나무는 소나무와 같은 양수이지만 생태의 특성이 조금 다르다. 소나무는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식물의 생장을 저해하는 화학물질을 분비하는데 이를 타감(他感)물질이라고 부른다. 타감물질은 뿌리에서도 분비되고 잎에서도 만들어지는데 그 속에서 낙엽활엽수가 싹을 틔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카시아나무도 성장초기에는 촘촘하게 줄기를내어 다른 식생을 차단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큰 나무 몇그루만 성장하게 되고 뿌리와 잎은 비옥한 공간을 만들어내 궁극적으로 다른 식물의 성장을 돕는다. 그러나 모든 양수는 음수에게 권력을 내줘야 하는 숲의 천이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명예롭게 사라져 주어야 하는 것이 천이의 숙명이다. 근대화의 주역인 박전대통령이 권력의 끈을 놓지 못했듯 세상의 모든 기득권은 역사의 무대에서 제발로 걸어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만의 때가 있는 세상에서 어찌 아카시아나무만이 기득권을 지켜낼 수있을까.
순리를 거스르며 살겠다면 그건 아마 아카시아나무들의 오만일 것이다. 밀원림을 조성해야한다면 이 천이과정의 특성에 걸 맞는 헛개나무 백합나무 음나무 등의 새로운 밀원수종을 선택해서 심어야 한다. 세력을 상실해버린 아카시아나무를 적극적으로 심자는 것은 최선의 발상이 될 수 없다.
한국인의 정서속에 애증으로 살아남다
아카시아나무의 흥망성쇠를 잘 말해줄 장소는 옥란재 뒷산과 인근의 숲 뿐만이 아니다. 전국의 모든 야산은 아카시아나무와 얽힌 이야기를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건 아카시아나무와 맺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춘궁기 때 아카시아 꽃으로 밀가루에 버무려먹던 꽃잎 떡을 잊 32
지 못한다. 하긴 나 역시 어린 시절 학교 갔다 오는 길옆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아카시아 꽃을 즐겨 따먹던 기억이 있다.
태풍 곤파스가 지난후의 옥란재 아카시아숲의 모습. 우뚝 서있는 나무는 음수인 참나무다.
초등학교에서 기르는 토끼와 염소먹이를 위해 아카시아 잎을 훑어오라는 숙제도 있었다. 그리고 70년대 초기 왠만한 농가에서는 토끼 한두 마리씩 키웠는데 토끼 먹이로 최고인 아카시아 잎을 따는 역할은 언제나 소년 소녀들의 차지였다.
꽃잎 따먹기 놀이 . 손가락으로 잎을 튕겨서 멀리 보내는 놀이 등 소년들과 동네야산의 아카시아나무는 추억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서로 만난다.
내 기억속에서도 아카시아나무는 아름다운 추억과 나쁜 기억이 상존한다.
싱그러운 꽃향기와 베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 산림을 망치는 ‘나쁜 나무’를 향한 기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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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서 속에는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미묘한 애증이 교묘하게 배합되어있다.
어른들은 아카시아 꽂 향기에 도취해 옛 기억의 향수와 추억에 젖다가도 돌연 ‘일제가 심은 나쁜 나무’라며 미움의 화살을 쏜다.
농부들은 미움을 넘어 아예 낫과 톱을 들고 기회만 있으면 아카시아나무를 자른다.
그러나 요즘에 산에 가면 수 십년 전처럼 낫과 손 톱정도로 자를 수 있는 어린 아카시아나무들이 많지 않다. 워낭소리의 주인공 할아버지가 나무를 하는 곳을 자세히 보면 큰 교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이 아니라 공사로 깎여진 척박한 도로 경사면 야산이다. 숲의 최초 천이가 시작되는 양지바른 곳이다. 대부분 우리가 맹렬한 수세의 아카시아나무를 볼 수 있는 곳도 이렇게 인위적으로 생겨난 박토인 불모지에 한정되어있다. 천이가 진행된 숲에서는 어린 아카시아나무가 자랄 수 없다.
나는 지난해 가을 산림조합으로부터 수종갱신 권고를 받았다. 리기다소나무 아카시아나무 등의 잡목림을 베고 조선소나무 혹은 백합나무 등을 심으라는 것이다.
특히 아카시아나무는 쓸모없는 잡목이어서 지방자치단체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베어내고 있다고 한다. ‘남산에 많은 아카시아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소나무를 심는 이유를 아시느냐’고 질문까지 받았다.
그러나 나는 옥란재 뒷산 한 켠으로 밀려나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세력으로 잔존하 는 아카시아나무들을 베어낼 생각이 전혀 없다.
한 때 우리 산의 구원투수로 발탁되어 모두의 희망 속에 심겨졌고 아름다운 노랫말의 가사가 되기도 했지만 이내 고약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천덕꾸러기로 전락된 나무-. 나와 내 아버지, 어린나이에 우리집안의 일꾼으로 들어와 농사를 돕던 용성이 형과의 모진 싸움 속에서도 곧은 줄기를 세우며 강인한 생명력으로 숲의 지배자가 된 나무. 그러나 이제는 곁의 수많은 음수와 경쟁하느라 제법 커진 몸통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해진 아카시아나무는 어쩌면 산업화 시기를 함께 살아온 우리 모두의 자화상 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전쟁이후의 피폐해진 우리의 삶을 다시 일궈낸 강인한 한국인의 정신사와 궤적을 함께하며 폐허의 산림을 일궈냈지만 온갖 구박과 학대를 받으며 버텨왔던 장엄한 나의 아카시아는 지금도 옥란재 뒷산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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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고 있다기보다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토심 속으로 깊게 뿌리내리지 않는 아카시아나무는 특성상 비옥해진 토양위에서는 50년 이상 생존하는 경
우가 드물다. 그렇다면 맹위를 떨쳤던 한 때의 강력한 이 나무의 권력은 처음부터 장기집권과 무관하지 않았을까. 숲을 복원하고 그 숲에 쓰러져 죽은 뒤에도 거름이 되어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기꺼이 버팀목이 되어줄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한국근대사의 인물이 저격수의 총에 쓰러진 이후 이 인물을 닮은 아카시아나무 또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두려웠고 그 통치의 폭압이 몸서리치도록 싫었지만 모두가 어려울 때 다시 그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다.
번창했던 아카시아나무 숲에 얽힌 많은 사연도 그렇게 한국인의 정서 속에 각인될 것이다.
이제 태풍이 불어 올 때마다 옥란재의 아카시아나무는 하나 둘 ‘총맞은 것처럼’ 구겨져 내려않을 것이다..
아카시아나무가 주저앉은 숲에는 그늘에서 웅크리며 다음 세상을 기다리던 때죽나무 팥배나무 쪽동백나무 참나무류 산벚나무 음나무가 기지개를 펴며 일제히 하늘로 솟구치는 장관이 연출될 것이다.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으랴. 정말이지 영원한 것은 없다.
태풍이 지난후의 이야기
아카시아나무이야기를 마무리할 즈음 나의 숲에는 예기치 않는 손님이 찾아왔다.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바람을 앞세운 태풍 <곤파스>가 서해 바닷가에 있는 우리동네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나는 순간 우주영화에서나 본 듯한 폭풍에 천지가 다 날아가는 공포를 느꼈다. 원시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집안에 꼭꼭 숨어 밖의 변고를 내다 볼 엄두조차 못냈다. 과학에 대한 상식과 매스미디어가 없던 시절 이런 자연의 공포를 만났던 무지했던 사람들에게 ‘신’은 어쩔 수 없는 도피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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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옛집 옥란재에서 태어나 자란 나의 생애동안 처음 만나보는 자연재해였다. 지난해 나는 옥란재를 찾아온 지인들에게 고향에 대한 자랑을 했다. ‘나의 집은 복받은
장소라고 ’ ‘한 번도 수해를 입은 적이 없고 태풍조차 비켜가는 지역이라고’ 이렇게 .우쭐댄 지 한 해만에 옥란재는 전격적으로 태풍의 직격탄을 맞았다
태풍의 직격탄으로 쓰러진 아카시아나무 뿌리에 새로운 맹아지들이 돋아나고 있다.
남쪽 바다에서 열대성 저기압이 생성되어 수증기를 머금으며 이동해 오는 태풍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식이 전무하고 이를 시시각각 알려주는 TV조차 없던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분명 초자연적 신에게 정신적 공황 상태의 진정을 의탁했을 것이다.
태풍은 바람과 함께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순간 폭격 맞은 산야의 풍경 앞에서 아연실색했다. 옥란재 뒷동산의 나무들은 아주 처참한 몰골로 구겨져 버렸고 마당 한 켠에서 70여년을 잘 자라온 소나무 10여그루도 벌렁 누워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36
비교적 뿌리를 단단하게 박고 살아왔던 수령 100여년된 참나무는 우람한 허리가 꺽인 채 널브러졌고 리기다소나무 헛개나무 참중나무 할 것 없이 앞으로 뒤로 곤두박질 친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나의 아카시아나무 숲도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옛날 이곳이 아카시아 밭이었다는 명목을 지탱해주던 수 십 그루의 거목조차 대부분 일자로 누워버렸다. 모두 뿌리를 들고 일어서며 흙을 묻힌 채 넘어진 모습은 강력한 총탄에 저격당한 끔찍한 시신을 연상케 했다.
산림과학원의 육종학자인 정헌관 박사는 1970년대 10%를 육박했던 아카시아림은 이번 태풍으로 전체 산림의 2%에서 1.5%대로 줄어들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양봉농가들의 바램과 정부의 밀원수 늘리기 계획과는 정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북한산, 도봉산 ,청계산, 대모산, 등 서울 근교의 야산에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아카시아나무의 피해가 제일 극심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면 아카시아나무가 전멸되는 것 아닌가’ ‘아카시아 꽃과 향기로운 꿀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결국 이 땅에서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모든 변화의 아픔을 견딜 수 없다’는 정현종시인의 ‘견딜 수 없네’의 시, 한 구절처럼 옥란재 숲의 아카시아나무도 그 향기로운 꽃향기와 함께 ’있다가 없고‘ ’보이다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인공조림을 별도로 하지 않는 한 자연 상태에서는 숲의 천이(遷移)현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카시아나무의 몰락을 막을 방도가 없다.
그러나 돌고 도는 세상의 큰 이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숲의 천이는 참나무 류 같은 음수들의 권력마저 영원히 세세토록 길이 보전해주지 않는다.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만에 하나 산불 같은 재해가 산림을 휩쓸거나 인간이 만든 재앙이 숲을 망친다면 산림 복구를 위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아카시아, 소나무와 같은 양수 류의 나무다. 37
근근이 명을 보존한 소수의 아카시아나무는 그 때까지 몸을 낮추고 잃어버린 권력의 뼈아픔을 체득하며 살아갈 것이다.
태풍으로 키 큰 나무가 쓰러진 나의 숲속에서도 막 돋아난 아카시아 맹아지들이 그날을 위해 다시 고되고 긴 삶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기다리면 때가 온다는 것쯤은 나무들도 다 알고 있다.(*)
홍사종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정동극장장을 역임했고 숙명여대 문화관광학과 교수, 동 대학 정책대학원 주임교수, 문화예술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교내 문화벤처기업 (주)아트노우를 설립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 동양생명에서는 마케팅 자문교수를 역임했다.
정동극장장시절 정동극장의 성공적 운영으로 공기업 경영혁신 최우수상, 지식경영대상 최우수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985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입상 극작가로 활동해왔고, 현재는 미래상상연구소 대표와 옥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있으며 농민신문에 연재 홍사종의 상상칼럼,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국민일보 등 국내 주요 일간지의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 KTV(한국정책방송) 인문학열전 진행자, TV, 대학, 기업등에서 강의를 맡고 있으며 생가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용두리에서 양봉․육림연구․신품종묘목개량 등 농업연구 활동도 겸하고 있다.
아카시아나무에게 권력과 인생을 묻다
- 박정희와 함께 헐벗은 국토에 등장해서 산림을 살리고
폭풍의 저격으로 생을 마감하는 아카시아나무 이야기 -
홍사종(미래상상연구소 대표)
필자의 고향집 옥란재의 아카시아 나무. 40,50년 자라면서 수세(樹勢)가 약해져 왕성하게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잘못된 상식
잘못된 상식이 유통되면 세상에는 불의의 변(變)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독교가 중세(中世)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시절, 교회지도자들은 백성을 쉽게 종교의 품안에 넣고 길들이기 위해 ‘마녀(魔女)’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만들어냈다. 악마와 천사
1의 대위법(對位法)은 선(善)과 악(惡)으로 양분되어있는 세상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했고, 바로 소위 ‘악마의 파티에 참석한’ 부녀자를 고문해서 불태워 죽이는 마녀사냥은 ‘보편적 상식’의 당연한 결말이었다. 인간의 집단 새디즘적 광기는 이렇게 잘못된 상식의 유통으로부터 출발할 때가 많다.
대개 이런 경우는 막연한 확신과 이를 사실인 것처럼 유통시키는 사람들의 무지가 원인이 된다. 과학에 무지했거나, 아니면 진실을 확인하거나 알아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이 만든 비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세상의 진실은 어둠 속에 갇혀버린다.
어디 잘못된 상식의 유통이 역사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세상에는 가려내야 할 잘못된 상식이 많다.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아카시아나무는 일제가 우리나라 산을 망치려고 심었다지요?”
작년 오월 화창한 봄날, 아카시아나무꽂이 핀 골프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동석한 변호사와 나무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 내가 받은 질문이다. 전북이 고향인 이 변호사는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아카시아나무는 일제(日帝)가 고의적으로 우리 강산에 심어놓은 나무’라는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화성시 바닷가 마을에서 자란 나 역시 초등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수 없이 들었다. 농촌에서 자란 대부분의 성인 남녀들의 뇌리 속에 아카시아나무는 유년시절 그 꽃의 향기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가시 때문에 나무하기도 어렵고’, ‘땔감밖에 용도가 없고’, ‘무서운 맹아력(萌芽力)’으로 온 산을 망쳐놓는 나무’ ‘조상 산소를 파고 들어오는 못된 나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어른들로부터 사사(師事)받은 대로 나의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고정관념도 중․고등학교시절까지 그 정도에 머물러 있었음을 고백한다. 기억하건대 1970년대 내가 살던 동네의 모든 야산은 아카시아나무 천지였다.
조선 솔이 울창했던 우리 집 뒷동산을 제외하고 동네 산이란 산은 죄다 민둥산이었다. 봄부터 좀 모질다 싶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날이면 산등성이로부터 쏟아져 내려오
2는 시뻘건 황토물은 도랑에 넘쳤다. 장마철 폭우에 이 산 저산 깊은 계곡이 생겨나는 것은 예사였다. 토사(土砂)를 막는답시고 정부에서는 사방(砂防)공사를 실시했는데, 사방공사용 나무심기의 수종(樹種)이 대부분 아카시아나무,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였다. 뿌리 뻗기를 잘 하는 아카시아나무는 금세 산을 뒤덮었고, 땔감이 모자라는 동네 사람들은 산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무지게를 지고 이 산 저 산을 몰래 옮겨 다녔다. 집집마다 아궁이를 갖고 있었던 동네 사람들이 산에 가서 제일 먼저 자르는 나무 또한 아카시아나무였다. 그야말로 화력도 좋고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땔감이 아카시아나무였기 때문이다.
맹아지(萌芽枝)에서 돋아날 때부터 무시무시한 가시를 달고 자라나는 아카시아나무는 그렇게 빈곤하고 남루했던 시절에 사람들에게 부족했던 시비(柴扉)와 양봉가(養蜂家)들에게 중요한 밀원(蜜源)을 제공해주었지만 온갖 천대를 받으며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속 잘라도 없어지지 않는 아카시아나무의 맹아지가 소나무와 밤나무 등 선호하는 품종의 나무만 가꾸고 싶었던 산주(山主)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땔감의 부족이 없었던 우리 집의 경우 막 식재(植栽)를 끝낸 뒷동산의 리기다소나무 묘목쪽으로 뻗어오는 아카시아나무숲의 팽창을 막기 위해 한 겨울 일꾼을 동원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크라묵손, 근사미(글라이포세이트)’라는 제초제(除草劑)가 아카시아나무 맹아를 박멸시키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나도 아카시아나무를 박멸하기 위해 읍내에 나가서 제초제를 무수히 사서 뿌린 기억이 생생하다. 베어진 나무뿌리 끝동 여기저기 붓으로 제초제를 바르고 또 발랐지만 기적처럼 아카시아나무는 비만 오면 새순을 돋곤 했다. 1960년대 1970년대- 그 시대의 숲의 권력자는 단연 아카시아 나무였다. 결국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쳐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사람의 손길이 많이 타는 인구밀도 조밀지역의 야산을 독차지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많은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바로 아카시아나무 무용론(無用論)을 가르쳐준 당시의 어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朴正熙) 전(前) 대통령이 실시한 산림녹화(山林綠化)사업의 주요 사방림 중 하
3나가 아카시아나무였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나 역시 아카시아나무,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등을 1960년대 후반 사방공사에 동원되어 심은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당시의 어른들은 자신들이 심은 아카시아나무에 냉랭한 시선을 보내며 자신들과의 인과(因果)를 부정했을까. 부정한 것이라기보다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점이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나중에 자세한 설명을 하겠지만 일제시대 아카시아나무가 우리나라에 심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한 어른들은 왜 우리 강산에 아카시아나무가 보급되게 되었는가하는 중요한 배경을 외면한 채 ‘일제가 심었다’라는 감정적인 점만 부각시켰다.
‘일제가 우리강산에 가시투성이의 아카시아나무를 심은 것은 아마도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산이 아카시아나무의 폐해(弊害)로 고통(?)을 입고 있을 때 일제가 심었다는 사실은 아주 좋은 감정적 먹이감이 됐다.
그 옛날 아카시아 숲이었던 옥란재 뒷동산에 쓰러져 있는 40,50년생 아카시아 나무. ‘총 맞 은 것처럼’ 쓰러진 아카시아 나무 사체 옆에 산벚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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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카시아나무는 일제가 우리 금수강산(錦繡江山)을 망치기 위해 심은 나무라는 고약한 상식을 뒤집어썼다.
그 잘못된 상식은 2009년 3월 경상북도 문경에서 있었던 영화촬영지의 일화에서까지 소개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김충렬 감독의 인터뷰기사에서 주인공 할아버지에 대한 일화(逸話)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자꾸 산에 가서 아카시아나무만 베길래, 왜 힘들게 아카시아나무만 베시냐고 물었더니, ‘일본 놈들이 우리 산을 망칠라고 심은 거라서 이것부터 벤다’고 했다. 이 부분은 혹시 문제가 될 것 같아 편집에서 잘랐다. 괜히 일본과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이다.”
김 감독의 큰 안목에 고마워하기만 하기 에는 왠지 씁쓸하기 짝이 없는 예화(例話) 가 아닐 수 없다.
경북 칠곡의 아카시아 숲에서 양봉인들이 ‘일제가 심은 아카시아 나무’라는 잘못된 상 꿀을따고 있다. 식과 유사한 일이 서울 한복판 세종로 은행 나 무 에게도 일어났다.
‘세종로의 은행나무는 일제가 한반도 영구지배를 목적으로 심은 나무이기 때문에 뽑아서 옮겨야한다’는 여론과 광장 조성을 이유로 자라던 곳에서 뽑혀지는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 은행나무는 용문사의 천년거목 은행나무가 말해주듯 일제시대 이전에도 이
5 땅에서 자라왔고, 인간이 이 지구상에 출현하기도 훨씬 전인 2억8000만 년 전에도 지구의 원주목(原主木)으로 이 땅을 지켜왔다. 메타세쿼이아와 함께 화석(化石)나무라고 불리우는 은행나무의 생명력을 일제지배의 영구화로 상상해서 엮어내는 무지한 사람들의 빈곤하기 이를 데 없는 상상력 때문에 우리 의 세종로 은행나무들은 팔다리가 잘려 이리저리 실려 다니는 서글픈 신세로 전락됐다. 일제와 얽힌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잘못된 상식은 여기까지다.
그 밖에 아카시아나무와 이어진 우리들의 인연은 대부분 정서적인 부분으로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이 나무의 생애를 잘 들여다보면 정말 대단한 인생과 권력의 흥망사를 그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한때 전체 산림의 10여 %를 장악하고 번영했던 아카시아나무숲이 지금은 불과 전체 숲의 2% 미만 밖에 유지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으리라.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무지한 상태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던진 속설(俗說)만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속내를 잘 내 비치지 않는 사물 속에는 보석과 같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세계의 단면이다.
그 많던 아카시아나무 어디로 갔나
초등학교시절 어른들과 함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용두리의 집, 옥란재(玉蘭齋) 뒷동산에 심어져 내 생애와 함께 살아온 고향의 아카시아나무는 지금도 나의 숲과 나무를 이해하게 해주는 선생이 되어주고 있다.
무차별적인 연료채취로 우리나라의 산이 몸살을 앓고 있었을 1970년대 초, 또 다른 재앙이 우리 숲을 덮쳤다. 소나무 송충이가 극성을 부린 것이다. 초등학생인 나와 학우들 모두 송충이 잡기로 동원되던 그 시절, 우리집 뒷동산의 수백년 아름드리 조선소나무도 그 피해를 입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가서 허가를 받고 부랴부랴 송충목을 베어 서울에서 온 나무장사에게 팔았다. 그 거대한 소나무림은 수백년 동안 조상들이 지켜온 옥란재의 소중한 상징숲이었다. 이후 산사태 방지를 위해 2만여평의 산에 인위적으로 심어진 나무는 리기다소나무와 일정부분의 아카시아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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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밖에 참나무류, 팥배나무, 때죽나무, 오가피나무, 헛개나무 보리수나무, 일본목련나무, 밤나무, 노각나무, 음나무, 두릅나무 등 70여종의 나무종류가 다양하게 분포한 아름다운 숲으로 변신했지만, 당시만 해도 옥란재 뒷산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야산은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 등 몇 종 안되는 나무들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당시 벌거벗겨진 산에 심겨진 이후 엄청난 맹아력으로 온 산을 덮을 듯 맹렬하게 자라나던 그 많은 아카시아나무는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통계조사에 의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아카시아숲은 전체 숲의 2%정도인 12.5만ha에 불과하다고 한다.
중․장년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의문일 정도로 아카시아숲은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다. ‘동구 밭 과수원 길’에 그 많던 하얀 아카시아꽃과 향기는 어디로 갔을까.
서울한복판 남산에 번성하던 아카시아나무도 이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서울시가 ‘나쁜 나무’로 지정하고 마구 베어 버려서이기도 하지만, 40~50년을 살면 제 힘에 겨워 쓰러져 사라지는 나무도 많기 때문이다.
서울 야산 등성이에 쓰러진 나무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다 40년에서 50여년정도의 수령(樹齡)인 아카시아나무들이다. 북한산과 청계산 등지의 등반로를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쓰러진 아카시아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숲 가꾸기 근로사업 중에 쓰러진 아카시아나무로 벤치를 만들어 재활용하는 구청도 많다. 양천구의 나무벤치 상당수는 이 쓰러졌거나, 베어낸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졌다.
서울뿐이랴. 일제가 심어서 우리강산을 망치려 했다던 아카시아나무는 전국적으로 지방자치단체의 무지막지한 산림행정에 의해서 궤멸당하고 있다. 산에서 나무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지만, 산간오지의 사람들은 무의식속에 드리워진 고정관념이 시키는 대로 ‘나쁜 나무’ 아카시아나무부터 도륙(屠戮)을 했다.
이 와중에 제일 가슴에 멍이 드는 사람들이 양봉농가들이다. 년간 꿀 생산량 3500억
7원 중 70%에 상당하는 꿀을 이 나무의 꽃으로부터 생산하기 때문이다. 양봉하는 분들은 다시 우리 강산에 아카시아 나무를 심자고 한다. 한쪽에서는 ‘나쁜 나무’ 아카시아나무를 국민의 혈세를 써가며 도륙하고 있고 또 한쪽은 효자 밀원 수종인 아카시아나무를 다시 심자고 아우성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말이 맞는 말일까.
나무의 삶속에는 문화와 한 시대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스페인과 모로코 이태리 등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지중해지역을 여행해 본 사람들은 마치 우리나라 소나무인 적송(赤松)과 같이 우람하게 잘 자란 지중해의 소나무를 인상 깊게 기억할 것이다. 하늘을 찌르고 우뚝 서있는 기상(氣像)도 기상이거니와 초록색 여인의 치맛자락을 뒤집어놓은 것같이 풍성한 가지에 감탄할만한 소나무는 특히 로마의 멋진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낸다. 레스피키의 유명한 곡 <로마의 소나무>는 우렁차게 하늘을 받치고 있는 지중해 소나무들을 향한 찬가(讚歌)다. 소나무의 생김으로 보면 우리나라 소나무인 적송과 동일하지만, 산림과학원이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소나무의 총 종류는 120여가지나 된다. 조선소나무도 적송과 흑송(黑松․해송)으로 분류가 되지만, 우리나라 안에서도 지역적으로 서로가 형질이 조금씩 다른 소나무들이 수없이 분포하고 있다. 지중해의 소나무는 우리 소나무와는 완전히 다른 품종이다.
이 소나무에 반해버린 나는 그만 ‘이 나무를 한국에 옮겨 심는다면 어떨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옮겨 심는 방법은 딱 한가지다. 어린 소나무 묘목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소나무 묘목을 구 할 수 있더라도 비행기까지 싣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다. 결국 최종적으로 머리를 쓴 것이 솔방을을 따가지고 가서 솔씨로 번식 시키는 방안이었다.
여행지에서 특이한 식물 종자만 보면 현대판 ‘문익점(文益漸)’이 되어서 여기저기 봉지에 담아 한국에 들여오는 나의 습관은 급기야 지중해 소나무종자를 한국에까지 들여오는데 성공했다. 아파트 베란다의 양지바른 쪽에 푸른 솔방을을 한 달 정도 말리고 나서야 솔방울에서 적송 씨 보다 조금 크게 성장한 솔씨가 터져나왔다.
그 해 늦은 가을 나는 소중하게 생산해 낸 지중해소나무의 자식들을 옥란재의 양지바
른 산기슭에다 살 자리를 마련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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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沙防)의 날’ 이 처음 제정된 1960년 3월 2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기념식
참가자들이 곡괭이를 메고 민둥산을 오르고 있다.
그리고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게 내리쬐던 다음해 봄날 경이롭게도 어린 솔씨가 하늘로 솟구치는 장엄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고향의 집 옥란재에도 지중해소나무가 넓은 치맛폭을 드리울 날을 꿈꾸면서 나무의 성장을 관찰했다. 총 15주가 3.5cm정도 자랐다. 그 신비스러움이란. 나는 마치 서양문물은커녕 서양의 금발미인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바닷가소년이 백옥색 피부의 금발소녀를 맞닥뜨린 것 같은 충격과 두근거림으로 돋아나는 지중해의 자식을 보다듬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주었다. 겨울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와 달리 영하 수 십도의 이상의 혹한(酷寒)에도 잘 버텨주는 우리 소나무와 다른 삶의 환경을 지중해의 자식들이 잘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겨울 내내 비닐로 몇 겹 보온(保溫)을 해줬고 따사로운 날은 비 닐을 벗겨 탄소동화작용을 할 수 있게끔 도 와줬다.
살추위를 피하고 겨울을 무사히 난 이 소나무가 봄을 맞이했을 때 문제가 일어났다. 9
너무 밀식된 채 촘촘히 자란 솔포기들을 옮겨주려고 모종삽을 밀어 넣었는데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놀라운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종삽을 들어 올리는 순간 소나무 모종의 뿌리가 중간 단계부문에서 다 잘려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의 경험으로는 모종의 크기가 3.5cm정도 되면 뿌리의 깊이는 지표면으로부터 4~5cm를 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 소나무 뿌리는 9~10cm를 이상으로 깊숙이 내려가 있는 것이 아닌가.
모종삽 정도로 떠 낼 뿌리가 아니라 아예 삽질을 해야 온존하게 캐어낼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는 비로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을 사전(事前)에 인지(認知)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삶의 풍토 즉 환경조건과 문화가 달랐던 것이다. 지중해성 기후는 겨울은 습하지만 춥지 않고 여름은 고온 건조하다.
지중해를 여행할 때 마다 늘 보는 풍경이지만, 해안가를 차지하고 있는 오렌지나무,
포도나무 , 올리브나무 등 과수나무는 대개가 봄과 여름에 성장한다. 밀 보리 등 초본류(草本類) 농작물도 이 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지만, 강수량(降水量)이 절대 부족한 이 지역에서는 과수(果樹)농업이 유리하다. 표토(表土)가 일찌감치 말라버리기 때문에 10cm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초근류(草根類) 농작물은 재배가 어렵다.
수 천년동안 이 기후 속에서 자라온 지중해의 소나무들이 생존을 위해 축적된 삶의 지 혜가 솔씨의 유전적 형질 속에 담겨져 온 결과다. 이른 봄 씨앗이 발아(發芽)되면 곧 다가올 마르고 척박한 죽음의 여름을 대비하여 땅 속 깊숙이 물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곳으로 달려가야만 하는 조상들의 지혜가 DNA속에 축적(蓄積)됐기 때문이다.
씨앗들은 사할린의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돼왔듯 멀리 강수량이 풍부한 한국 땅으로 강제 정착된 것도 모른 채 생존을 위해 비정상적(?)으로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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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지중해의 소중한 자식들은 옥란재에 와서 2년도 못 넘기고 생을 마감했다. 뿌리를 뻗는 것은 나무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행동이고 생존경쟁의 첫 단계다. 뿌리는 땅속의 많은 수분을 쉴 새 없이 빨아들인다. 수분은 나무의 체관부(체관, 사부 유조직, 사부 섬유, 반세포로 구성된 복합 조직. 물질의 통로가 된다)를 통해 가지에서 잎으로 전달된다. 나무는 이 수분을 통해 마그네슘 등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걸러낸다. 영양분은 끌어올린 수분 중 극히 미1968년 식목일 행사 후 박정희 대통령이 소량에 불과하다. 산소와 수증기는 나뭇잎의 경기도 청계산에 리기다 소나무를 심고 있다. 기공을 통해 흡수한 수분이 방출되기 때문에 빠져나온다. 인간에게 유익한 물질인 산소와 피톤치트는 사람으로 치면 일종의 나무의 ‘대변 보기’일 수 있다. 수분을 증발해 내는 증산(蒸散)작용은 나무의 ‘소변 보기’이다. 이 맑게 걸려진 소변이 운무를 만들어내고 비를 만들어 낸다.
아무튼 태양의 빛을 받아들여 광합성(光合成)을 하는 나뭇잎 못지않게 나무에게 있어 뿌리는 생명의 모태다. 그런데 앞서 예시한 지중해소나무의 경우처럼 나무마다 뿌리 뻗는 방식이 다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 중 아카시아나무의 뿌리 뻗기 방식은 아주 특별하다. 표토 깊숙이 뿌리를 박는 다른 나무와 달리 콩과식물의 특징을 간직한 아카시아나무의 뿌리는 언제나 얕은 땅속을 거의 수평으로 기어 다닌다. 뿌리 혹 박테리아를 통해 공기 중에 질소를 고정시켜 양분으로 삼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공기와 접촉하는 뿌리 부분에서도 줄기가 될 눈을 만들어 왕성한 맹아력을 만들어낸다. 햇볕만 있다면 순식간에 온 산을 덮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같은 콩과 식물인 오리나무 쉬나무와 싸리나무도 같은 방식으로 식생(植生)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특질 때문에 아카시아나무와 우리의 숙명적 인연이 시작됐음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나무, 그리하여 거름기 11
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낼 수 없는 우리의 황폐해진 민둥산의 주인이 되어 한 때 숲의 지배자가 되었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나무의 일대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카시아나무의 생애 속에는 그 나무가 이 땅에 정착하고 살아온 기간이라고 할 수 있던 파란만장했던 한국의 산업화(産業化)시기와 얽힌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역사의 숨은 산 증인이 아카시아나무다.
박정희가 나무를 심기 시작하다
옥란재는 남양만의 작은 옛포구 왕모대를 낀 자그마한 농촌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변변한 우마차(牛馬車) 길조차 없었던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5년이었으니 1960년대 당시의 낙후된 사정을 어찌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 있을까.
인구가 밀집한 근기(近畿)지방, 특히 야트막한 야산을 끼고 있는 마을근처의 산들은 시뻘건 황토 산이었다. 서해안지방의 토양의 색깔이 빨간 것은 철분 함유랑이 매우 높은 토질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의 강점기간 동안 우리의 산림은 아주 심한 약탈에 시달렸다. 목재가 될 만한 나무들은 다 베어져 나갔고, 심지어 태평양전쟁 말기에 연료가 부족했던 일제는 우리 소나무의 관솔(송진이 굳어진 나뭇가지)까지 징발해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나무 관솔을 채취하던 기억을 동네 어른들은 긴긴 겨울 밤 술 안주삼아 되풀이해서 들려주곤 했다.
그 때는 집집마다 군 불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저녁 무렵 굴뚝위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이 목가적(牧歌的)이었던 그 때의 기억 뒤편으로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온 산에 여기저기 숨어서 나무하던 나무꾼을 쫒던 경험이다. 주인이 있는 나의 집 뒷동산은 송충이 피해를 보기 전 아름드리 조선소나무가 잘 자라고 있었지만, 소위 적산(敵産)으로 불리던 당시의 임자 없는 산과 동네에서 좀 떨어진 우리 집 소유의 야산은 밥 지을 땔감조차 없었던 가난한 나무꾼들의 등쌀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나무꾼들은 적산의 풀 한 포기조차 낫으로 베고 갈퀴로 베어갔다.
12소나무에서 떨궈진 솔가래(솔가리의 방언. 말라서 땅에 떨어져 쌓인 솔잎, 또는 소나무의 가지를 땔감으로 쓰려고 묶어 놓은 것)는 솔잎에 함유한 솔기름 때문에 참나무 가랑잎보다 인기가 높은 땔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뒷동산에 올라가면 솔가래를 누가 다 긁어가고 맨숭맨숭한 땅의 맨얼굴이 들어난 경우도 한 두 번은 아니다.
겨울날 가난한 농부의 아이들도 졸망한 망태기를 짊어지고 솔가래를 긁으러 다녔다. 긁어갈 솔가래가 없어지면 다음은 나무 등걸을 도끼로 찍어내 캐어갔다. 생나무는 물론, 억새풀, 솔가래, 가랑잎과 토사를 그나마 지탱해주는 죽은 나무 등걸까지 다 캐어간 고향의 야산들은 오랜 수탈에 못 견디며 죽어갔다. 낙엽과 솔가래가 썩어야 비료가 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데 모조리 걷어가 버리니 산림은 몽땅 피를 뽑아간 중병(重病)환자의 몰골처럼 처참했다..
장대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우리 마을의 논밭은 온통 뻘건 황토 물로 그려진 흉흉한 수채화(水彩畵)로 남았다. 적어도 내 어린 기억 속에 우리 동네의 풍경이다. 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을 잡아주는 저장고인 숲이 사라지니 토사가 논으로 밭으로 몰려오기 일쑤였다. 우리 집 모퉁배기 논은 언제나 장마철이면 논의 절반이상을 토사가 삼켰다.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불리는 한반도는 일제의 집요한 목재수탈과 해방의 혼란기를 이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전체 산림면적 670만ha의 3분의 1 가량이 나무
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가로지르던 국토의 모습이다.
미국의 토양보존학자 리치 콜더박사는 수 천년에 걸쳐 만들어진 산림도 사람이 잘못 취급하면 몇 달 사이에 사막으로 변하며 그 사막을 다시 산림으로 복구시키려면 수 천년이 걸린다고 했는데, 그 당시 우리 동네 야산의 모습은 사막과 다름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승만(李承晩)정권 시절에도 산림녹화사업은 이루어졌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정부는 남한 산림면적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105만 ha의 산림에 28억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가속도를 더해가며 황폐해지는 우리의 산림을 본래대로 회복시킨다는 것은 이 정도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우리의 주인공인 아카시아나무를 비롯해서 리기다소나무, 오리나무로 사 13
1975년 4월 경북 영일군 사방사업장을 시찰한 박정희 대통령이 관계자들에게 지시를 내리 고 있다.
방림(砂防林 ; 황폐한 산지를 사태방지용 수종과 초류를 심어 복구시킨 산림)을 조성하는 사업이 1967년경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 산림복구정책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나온 사람도 역시 박 대통령이다. 고향집에서 내가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던 시절인 1967년 한 해 동안에만 총36만 5천여ha의 엄청난 면적에 조림이 이루어졌다 (<산에 미래를 심다>, 이경준 著.서울대학교 출판부.2006년).
지금도 나는 그 때의 구호를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않고 있다. ‘치산녹화(治山綠化)’ ‘절대녹화’ ‘절대입산금지’ 등 내 남루했던 어린시절을 풍미했던 관제(官製)표어들을 외었을 정도면 산림녹화가 얼마나 강렬했던 당시의 과제였던 가를 짐작하게 한다. 민도(民度)가 낮고 응집력이 떨어졌던 사회에서는 얼마간의 강제가 동원된 정책은 나름대로 효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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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중학생 할 것 없이 수업시간을 빼먹어가며 우리는 면사무소에서 배당된 회초리같은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 묘목(苗木)을 들고 이 산 저산을 누볐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구호(救護)식량이 어른들에게 주어진 대가(代價)였는데 거의 부역(負役)이나 마찬가지로 불려 다녔다.
문맹률까지 높았던 우리 동네의 농민들은 당면한 연료부족과 곤궁한 삶 때문에 ‘산림부흥 속에 나라의 미래가 담겨있다’는 식의 당시의 관제 구호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산림감시원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여기저기 눈을 부라리고 있는 가운데서도 사방림에 심어진 1년 남짓한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가 연료용으로 절취당하는 일도 잦았으니까. 우리 집 소유의 또 다른 야산은 1967년부터 1970년 사이에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로 피복(被覆 ; 거죽을 덮어 씌움)됐는데 비만 오면 황토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낸 곳에 심겨진 나무도 거의 아카시아나무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가 말했듯 ‘일본놈’들이 심은 것이 아니였다. 우리가 심었다. 나도 고사리 같은 어린 손으로 수백 그루의 아카시아나무를 이 산 저산을 옮겨 다니며 심었다. 손마디가 아카시나무의 가시에 긁혀 피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이 ‘좋다’는 나무를 박토(薄土)에 꽂고 다녔다.
동네 어른들은 왜 이 가시 많은 나무를 심어야하는지 이유를 잘 몰랐다. 어떤 식물도 자리기 힘든 땅에서 과연 이 나무가 자랄 수 있을까 의문도 있었지만 그건 무지몽매한 초등생인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닌 듯싶었다. 오리나무, 아카시아나무, 리기다소나무. 이 세 가지 사방조림용 나무는 고향의 물과 불과 흙과 공기처럼 내 무의식속에 드리운 그림자가 되어 지금도 고향집, 옥란재와 연관된 숱한 기억 속에 살아있다 (나무들이 한 인생의 무의식까지 지배해가는 힘의 오묘함이라니).
굴러온 나무가 숲의 권력을 넘보다
아카시아나무는 도대체 어디서 온 나무일까.
해마다 5월의 화창한 봄날을 수놓는 아카시아나무는 ‘아까시’나무라고 불러줘야 맞다. 원래 아카시아(Acacia)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는 열대지방에 관목(灌木 : 키가 작고 15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며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나무. 무궁화, 진달래, 앵두나무 따위. 떨기나무)상으로 자라는 상록수(常綠樹)다.
우리가 지금 아카시아나무라고 부르는 나무의 정확한 이름(학명․學名)은 ‘로비니아 수도 아카시아’(Robinia Pseudo Acacia)다. 라틴어로 ‘가짜 아카시아 나무’라는 뜻이다. 산림청과 학계에서는 진짜 아카시아나무와 구별하게 위해 ‘아까시’나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식물학자들이 이구동성 세계 공통으로 쓰는 학명과 국제식물명명규약이라는 것을 들이대고 ‘너희들 맘대로 못 바꿔’라고 해도 사람들은 한번 잘못 각인된 친숙하고 정감어린 이름을 버리지 못한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부르던 아카시아 꽃 동요의 노래 말을 기억 속에서 깡그리 지워내지 못하는 한 ‘아카시아’라는 나무이름을 쉽게 버리지 못함을 고백한다.
동구 밭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실바람이 솔바람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없네 얼굴 마주보고 방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옥란재 뒷산을 횡(橫)으로 가로지르면 큰 규모의 우리집 복숭아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과수원길 좌우에는 풍경화의 한 폭처럼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나는 아직도 아련한 감정에 복받치며 이 동요(童謠)를 부른다. 이따금 고향의 옛집에서의 모든 기억들이 뒷걸음치며 멀어져갈 때, 나는 멀어져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붙들려는 몸부림으로 이 노래 가사를 흥얼거린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새하얀 아카시아 꽃 위로 그윽한 꽃향기와 함께 꾀꼬리 울음소리가 얹혀 질 때 느끼는 몽환적 풍경화의 장면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사람들이 끝까지 아카시아나무라고 고집하며 부르는 것은 나의 경우처럼 순전히 정서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녀석들의 원산지는 일본이 아니라 북미(北美)캘리포니아로 알려져 있다. 1897년 인 16
천공원에 처음으로 식목됐고 일제 치하 데라우치 조선총독 시절에 중국으로부터 아카시아 묘목을 들여왔다는 이주사의 기록이 있다. 일제가 처음 심은 것은 맞지만 일제가 한반도 강산을 망치려고 작정하고 심은 것이 아니라 황폐한 산림을 복구하는데 효용성을 시험해보는 단계였다.
한반도 특히 당시 조선 말기부터 민초(民草)들의 삶은 피폐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세도(勢道)정치와 지방관들의 학정(虐政)에 민란(民亂)이 빈발(頻發)하고 산업화를 진전시킨 서구열강의 침입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자 우리의 산림도 통제를 상실했다.
한 번 망가진 숲을 되살리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가는 앞서 서술했던 바다. 민가(民家)가 많이 모여 있던 근기(近畿)지방의 야산은 이 때부터 몸살을 앓았다. 우선 복구의 필요성에 제일 먼저 구원투수로 주목받았던 속성수(速成樹)가 바로 우리의 아카시아나무였던 것이다. 악의적(惡意的) 의도에서 일제가 우리 강산에 심은 나무가 절대로 아니다.
1960년과 1970년대 초까지 박정희 대통령은 산림복구의 피눈물 나는 열정을 쏟았다. 당시 산림청장의 위세가 웬만한 장관 못지않았음을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노력의 여파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이 발표되는데 10년간 100만ha에 조림을 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아카시아나무, 리기다소나무, 이태리포플러나무 등과 같은 속성수와 밤나무 같은 유실수(有實樹)를 7대3의 비율로 식재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동네 황토야산들은 사방공사 이후에 조금씩 산림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이 기간 동안 품종이 개량된 아카시아나무도 출현됐다. 이른바 가시 없는 ‘민둥 아카시아나무’와 잎이 4배체 넓은 ‘광엽(廣葉) 아카시아나무’다. ‘민둥 아카시아나무’는 무시무시하게 돋아나는 가시를 없애 산림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산림학자들이 연구해 낸 산물이다. 넓은 잎 아카시아는 잎이 보통 아카시아의 두 배 이상 크고 단백질 함량이 높아서 농촌의 염소나 토끼 녹사료(綠飼料. 뭇먹이. 식물이 싱싱할 때 베어 만든 가축의 먹이)로 인기가 높았다.
수원까지 나가서 아버지가 얻어온 이 묘목을 애지중지 키웠던 기억이 난다.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농업이 생산의 전부였던 당시의 산업구조를 개선하고자 연이은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산업화의 시동을 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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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아카시아 나무가 절경을 이룬 남한산성 입구. 아카시아가 우리 산을 지배하던 것도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불모(不毛)의 한국경제는 산업화의 큰 기치를 내걸었지만 갈 길이 너무 멀고 막연했다. 연료채취로 만신창이가 된 산 위로 세찬 비(외부적 재앙)가 내리면 식생(植生)의
자양(滋養 ; 몸의 영양을 좋게 함)이 될 양분들이 모두 깎여 내리듯 우리의 경제도 전란(戰亂)의 폐허 속에 산업자본이 고갈된 상태였으니 긴급 원조물자와 외국의 도움(차관 도입)이 절실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성급하게 한일(韓日)회담을 마무리하고 속성으로 차관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개발독재시대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은 대부분 속전속결(速戰速決)주의였다. 당시의 산림정책 또한 속성수를 도입해 빠른 속도로 녹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었다. 그 속성 18
수의 대표주자가 외래종(外來種)인 리기다소나무 아카시아나무 오리나무 이태리 포플러나무, 산림학자인 현신규(玄信圭) 박사가 개발한 은사시나무 등이다.
속성수의 상징인 아카시아나무는 바로 이런 박 대통령의 다급한 심정을 꿰뚫어보듯 전국의 모든 민둥산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굴러온 나무가 숲의 권력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산사태는 조금씩 방지되기 시작했고 산림은 조금씩 원래의 푸르름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조금씩 세월이 지나면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진리란 늘 옷을 바꾸어 입고 나타난다.
아카시아나무, 독재권력을 휘두르다
민둥산은 아카시아나무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구원투수인 우리의 아카시아나무가 토사유출 걱정이 사라지고 석탄연료의 보급에 힘입어 땔감걱정까지 사라질 때쯤 천덕꾸러기가 되어 나타났다.
어느 순간 어른들은 아카시아나무에게 ‘산림을 망치는 망측한 나무다’라는 고약한 낙인을 붙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1980년대를 들어서면서 산림의 원상회복이 조금씩 이루어지자 숲의 독재자로 자라난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사람들의 원성(怨聲)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것이다.
아카시아나무는 양수(陽樹 ; 어릴 때 햇볕에서는 잘 자라지만 그늘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는 나무)다. 양수는 절대적으로 햇빛을 많이 받아야 잘 자란다. 잎이 햇볕을 마주보며 광합성을 하지 못하면 여간해서 자랄 수 없는 나무다. 소나무 또한 대표적인 양수다. 햇볕이 조금만 있어도 생명을 잘 부지할 수 있는 참나무 등의 음수(陰樹)와 달리 이들 나무는 음수의 기세가 세지면 고사(枯死)되기 일쑤다.
음수와 경쟁을 한다면 필패(必敗)하는 아카시아나무가 왜 어느 순간 우리 산림의 독재자가 되어 숲의 권력을 몽땅 차지하게 되었을까. 아이러니컬하게도 햇빛을 독차지할 수 있고 다른 종(種)의 나무가 여간해서 자랄 수 없는 황폐한 산이었기 때문에 가 19능했다. 또 영양분이 다 사라진 척박한 산에서 기력을 일으킬 나무는 아카시아나무, 리기다소나무, 오리나무 등 몇 종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 산림의 강자(强者)로 거듭난 참나무류는 당시에는 심는다 해도 자라지 못했다. 거기다가 척박한 토양 속에서 콩과식물의 특징 중 하나인 모자라는 양분(질소)을 외부에서 차용해오는 특별한 재주를 아카시아나무는 가지고 있었다. 나무꾼이 가차 없이 줄기를 잘라내도 땅 표토 밑에서 맹아지를 만들어내는 생명력은 놀라울 정도다. 뿌리혹 박테리아가 있는 뿌리는 척박한 산에서 영양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기막히게 알고 있다. 응답이 없는 땅에다가 원조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공기 중에다가 원조를 요청해 질소라는 이름의 차관(借款)을 얻어내는 것이다.
자본이 없이 산업화를 시도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전략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한국경제의 기초를 닦는 것이었다.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그렇게 척박한 토양위에 아무렇게나 심어졌지만 산림을 다시 일으킬 방안을 외부에서 찾는 지혜를 만들어냈다.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순식간에 모든 민둥산을 점령해버린 이 나무는 사람들의 간섭이 없는 곳에서 맹위를 떨쳤다.
옥란재에서 멀지 않은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와 마도면 백곡리에 가면 남양 홍씨(南陽 洪氏) 참의공파(參議公派) 후손인 우리 집안의 묘지가 있다. 40여기가 넘는 이 묘지
는 성묘(省墓)철만 되면 곡괭이 삽 등이 동원된 공사를 해야 했다. 멀찌감치 심어진 아카시아나무가 순식간에 묘지까지 뿌리를 뻗고 내려와 맹아지를 내밀면서 잔디가 죽어갔으니 어른들의 심려가 만만찮을 수밖에.
뿌리는 질기고 단단해서 잘 뽑히지도 않았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풍겨나는 묘한 화학약품 같은 냄새는 역겹기까지 했다. 연례(年例)행사처럼 제초작업과 별도로 아카시아 맹아지 제거작업이 이루어졌다. 잘라낼 수록 오히려 기세를 더해가는 이 나무에 그루터기에 ‘근사미’처럼 강한 제초제를 바르면 맹아가 수그러든다는 말에 성묘 갈 때는 20
늘 제초제가 준비됐다.
뒷산 한 편의 복숭아과수원도 마찬가지였다. 산 쪽에서 밀려오는 아카시아나무 수세에 밀린 과수나무들은 양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과수나무들이 비실거리는 것을 본 나의 아버지는 어느 날 일꾼을 여럿 사서 산림을 덮고 있는 아카시아나무 제거작업에 들어갔다. 헛수고였다. 그 다음해에 더 굵은 가시를 내밀며 용솟음한 아카시아나무의 무리 앞에서 아버지는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아카시아나무를 자를수록 사방공사로 심어진 오리나무와 리기다소나무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가 애써 키운 이들 묘목까지 전멸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청년기의 아카시아나무가 자라는 산에서는 다른 나무들의 생존이 불가능했다. 끝없이 돋아나는 맹아력 때문에 절대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 식생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산밭을 일구며 살던 농민들이 겪는 아카시아나무의 피해는 더욱 심했다. 농민들은 아카시아나무를 하루속히 퇴츨 시켜야 할 수종으로 결론지었다. 소위 ‘나쁜 나무’(?)와 사람들의 전쟁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아카시아나무를 심기시작한지 10여년 만에 벌어진 세상인심의 변화다.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 할아버지처럼 나도 산에 지게를 지고 올라가면 우선 아카시아나무부터 낫으로 찍어냈다. 없애지 않으면 이 기세가 리기다소나무 숲까지 처들어 올까봐 걱정되서다. 어느 이른 봄날 우리 집 일꾼 용생이 형과 나는 지게를 지고 하루 종일 나무를 했는데 모두 가죽장갑을 끼고 톱질로 자른 나무가 몽땅 아카시아나무다. 얼마나 많이 잘랐는지 그 날 밤에 가시를 덮어쓴 아키시아나무 귀신이 꿈속에
나타날 정도였다. 또 겨울철 이파리를 다 떨구고 흉측한 가시만 남아 위엄을 떨구는 아카시아나무 숲은 원시적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른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심은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아카시아가 자신들이 심기 전에도 있었다는 것과 그 도입시기가 일제 시대였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애증으로 얼룩진 아카시아나무를 향한 상상과 추측이 부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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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제가 하필이면 이 지독한 나무를 한반도에 들여왔을까?’ 자연과학적 상식과 토양학, 산림생태학을 공부해보지 못한 시골사람들은 급기야 ‘일제 산림초토화설’을 만들고 기정사실화했다.
나쁜 나무를 향한 미움의 화살이 일본제국주의자들로 향해 꼿히는 바람에 이 나무를 온 강산에 적극 심게 했던 진짜 주인공인 박정희 대통령은 구설수(口舌數)를 피했다.
일제 때문에 구설을 피했다는 것이 맞는 답일까. 나는 좀 색다른 생각을 한다.
아카시아나무가 왕성한 발육을 하던 시절은 1970년대 초반이다. 황폐한 숲을 푸르게 했지만 결국 그 숲의 권력자가 된 아카시아나무의 행태는 어쩌면 박정희 대통령을 닮아있다. 독재와 파쇼권력으로 숲을 지배하기 시작했으니까. 197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3선(選) 개헌(改憲)을 마무리하고 유신(維新)독재로 넘어가던 시절이다. 대통령과 닮은 아카시아나무를 비판한다는 것은 긴급조치 위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시골어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지.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던 시절 ‘일본놈 탓’이라고 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카타르시스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의 뇌리에까지 이어지는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과 상식은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이와는 반대로 아카시아나무가 심어진지 10여년 이상 지나면서 보이지 않는 숲의 토양에서는 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카시아나무가 죽은 토양을 회생시키다.
장마철에도 우선 토사유출이 없어진 건 물론이거니와 거름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땅에 유기질 양분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먼저 박테리아의 도움으로 토양에 질소가 풍부해졌다. 가을에 떨구어 내는 아카시아 낙엽은 오리나무, 싸리나무 등 콩과 식물 이파리의 특징처럼 또 아주 쉽게 분해되어 토양 속에 몸을 섞는다. 유기물이 스며든 토양에 많은 미생물과 버섯 등의 진균류(眞菌類)가 서식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미생물과 뿌리에 붙어 공생(共生)하는 진균류는 서로 유기적(有機的) 공동체의 역할을 한다. 건강한 산림은 이런 유기적 관계가 22
형성될 때 가능하다.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나는 숲에 형성된 진균류의 균사(菌絲)그물망은 나무뿌리에 물과 영양분을 공급해준다. 진균류의 도움이 없다면 나무뿌리는 주변의 광물질(鑛物質)만으로는 그런 수분과 영양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균사들은 나무뿌리에 비해 흙에서 인(燐)이나 질소 같은 중요한 영양분을 뽑아내는 데 더 유리하며 당(糖)을 얻는 대가로 영양분을 나무에게 준다 (<나무와 숲의 연대기>, 데이비드 스즈키, 웨인 그레이디 著, 김영사. 2005년 8월). 균사는 흙 속에서 질소를 분해하고 벌레를 죽이기도 하며 벌레의 몸에서 미량원소를 흡수하기도 하는 효소를 분해하는데 이 효소 역시 나무에 전달된다.
아카시아나무가 경쟁자가 없는 황폐한 토양 위에서 권력을 확장시키며 만들어낸 숲에는 비로소 참나무,팥배나무, 밤나무,때죽나무 등 다른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 적정 환경이 조성된다. 경이롭게도 10년 20년 된 아카시아 나무숲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어린 팥배나무, 참나무, 음나무, 산벚나무 묘목들이 희망처럼 자라났다.
물론 아카시아 이파리의 그늘에 가려 광합성을 제대로 못한 이 나무들의 생장(生長)은 정말 보잘 것 없을 수밖에 없다.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카시아나무들이 박토를 기름지게 만들기 전에는 이 안타깝도록 애처러운 삶조차 참나무류의 나무들은 꿈도 꿀 수없는 일이었다.
다른 수종과 비좁은 땅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아카시아나무에게는 귀찮고 고역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이 모두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인과(因果)의 결실이었다.
숲은 비옥해졌고 20년 이상의 아카시아나무 숲 바닥에는 눈에 보이는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났다. 초본과 식물이 돋아나자 토양미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이 돌아왔고 개구리, 두꺼비, 뱀 등 파충류(爬蟲類)가 따라왔다.
그러나 이것은 아카시아나무에게 해를 끼치는 변화가 아니다. 유기적 생명공동체로서의 산림 본연의 생태가 회복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곤충과 동물은 산소로 호흡하고 23
탄소를 뺃어 낸다. 나무는 거꾸로 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만들어 공기 중에 뿜어준다.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이 정 반대다.
동물은 땅위에 자신의 배설물을 뿌리고 나무는 대소변을 공중에 날린다. 동물의 배설물은 땅속에 분해되어 나무의 영양분이 되고 나무의 대변인 산소를 포함한 피톤치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호흡을 이롭게 한다. 끊임없는 증산작용이 운무로 피어올라 비를 내린다는 것은 이미 앞에 서술한 바 그대로다.
비는 모든 생명의 윤회(輪廻)를 만들어 내는 원천이다. 이로서 숲은 본래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카시아나무가 그의 벗들인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와 함께 헐벗은 민둥산에 들어와 살림을 시작한지 어언 40~50년. 우리나라의 모든 산들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생태(生態)의 복원(復原)을 이루어냈다. 산림의 ‘압축 고도성장’을 이루어낸 것이다.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 은사시나무, 리기다소나무로 인공 조림(造林)된 고향의 모든 야산도 이제는 다양한 식생들이 눈에 띄게 번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순간에 망쳐진 산림을 30~40년만에 기적같이 복구한 우리의 실력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산림정책 리더십과 압축성장을 가능하게 한 아카시아나무의 공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청년기(靑年期)를 지나 장년기(壯年期) 이후로 성장한 아카시아나무에게도 근심거리가 생겨났다. 숲의 민주세력들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숲의 민주세력들이 성장하다.
겉보기에는 완벽할 정도로 숲을 지배하는 독재권력을 완성했지만 나무사이에서는 훗날 권력을 위협할 새로운 세력이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다. 드리운 가지 사이로 겨우 비집고 들어오는 손바닥만한 작은 햇볕을 양분삼아 자라나던 어린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산벚나무 등이 키를 키우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아카시아나무의 근심은 불안으로 바뀌어갔다.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어느 날 자신의 그늘 밑에서 묵묵하게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이 녀석들의 아우성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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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나무만 숲을 차지하는 것은 ’생물다양성 공존의 원칙‘에 위배 된다’
‘최소한의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햇볕을 더 달라’
처음에는 광합성을 보장해 달라는 식의 ‘최저생계비보장’의 요구로 시작됐다. 이후 몸집이 조금 커지자 구호가 ‘숲의 민주화요구’ ‘아카시아나무 독재타도’로 바뀌어갔는데 아카시아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들을수록 원통하기 짝이 없고 기가 찰 일이었다.
아카시아나무가 민둥산을 녹화하기 시작하기 전에는 참나무류의 낙엽활엽수들의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동안 외부로부터 양분을 얻어오고 자신의 이파리를 떨구며 일궈놓은 비옥한 토양이 있었기에 정착이 가능했던 어린나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물러나라’는 야유를 듣다니 적반하장의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숲은 아카시아나무들의 탄압과 새로 등장하는 음수들의 각축으로 한 바탕 소리 없는 전쟁을 치룬다.
그렇게 30.40년이 지나면 아카시아숲은 숲의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거목들이 등장한다. 민주화의 영웅들은 참나무류가 제일 많다. 참나무 류는 온대림 숲의 천이과정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는 나무다. 햇볕을 좋아하는 양수 류가 토양을 비옥하게 해주면 음수들이 자리를 잡고 결국 양수를 척박한 땅으로 밀어낸다. 참나무 류는 일조량이 부족해도 잘 자랄 수 있다. 이 인고의 상징수가 결국 숲의 민주회세력의 거목으로 자라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옥란재 뒷산 아카시아나무가 무소불위의 맹아지를 만들며 무성했던 숲에 가보면 40년 긴 세월동안 나무들의 투쟁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이 혈전(血戰)의 땅은 나와 우리집 일꾼이었던 용성이 형과 무수한 땔감을 베어내던 공간이다. 70년대 초 베어도 베어도 다시 솟아나온 맹아지에 지쳐 용성이 형과 나는 그 지역을 아카시아 밭으로 팽겨쳐 놓았다. 아버자와 우리 식구들은 모두 이 골짜기를 ‘아카시아밭’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많던 아카시아 나무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새 아름드리로 자란 나무들은 대부분 비바람이 몰아칠 때 혹은 태풍을 따라온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 쓰러졌다. 천근성(淺根性) 나무이기 때문에 땅속에서 지탱하는 힘이 약해 쓰러지는 경우가 대부분 25
이다. 오랜 인고를 견딘 참나무 류의 나무들이 하늘을 치고 나오면서부터 거꾸로 그늘에 가리워져 광합성을 못해 영양상태가 나빠진 원인이 작용한다.
빈약하기 그지없던 가느다랗고 긴 몇몇의 음나무와 상수리나무 졸참나무가 아카시아나무 군상의 탄압을 뚫고 하늘로 삐죽 솟구쳐 나오는 순간 양수의 운명을 타고난 나무의 시련은 시작된다. 참나무의 맹위를 아카시아 나무는 당해 내지 못한다.
햇빛이 모자라면 뿌리의 활동도 소강상태로 돌아가고 나무는 연약해 질대로 연약해진다.
양천구 신정동에 가보면 신투리 야산자락에 무수한 아카시아나무 군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척박해진 야산 녹화용으로 70년대 심은 나무가 성장해서 5월이면 매혹적인 향기를 일대 아파트주민들에게 선사한다.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면 여기저기 아카시아나무가 전복되어있다. 그리고 그 옆에 거대해진 몸통을 꼿꼿하게 세우고 우람하게 자란 참나무 류를 발견할 수 있다.
남산에서 보듯 아카시아나무가 쓰러진 옆에 거목으로 자란 벚나무는 사람이 심은 것이지만 참나무는 사람들이 심지 않은 나무다. 숲의 독재 권력인 아카시아나무에 대항해 무수한 탄압을 견뎌오다가 자신의 힘으로 하늘로 몸 한 가지를 고추세운 순간 참나무 류는 새로운 숲의 주인이 된다.
우리 집 아카시아나무 밭에는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꽃을 피우는 큰 아카시아나무 수 십여 그루와 참나무 류인 상수리나무와 음나무 일본목련나무 팥배나무, 때죽나무, 쪽동백나무, 밤나무 등이 어울려 어깨동무하며 살고 있다. 그 중 초기에 아카시아나
무숲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공헌한 두 나무가 있는데 아름드리로 자라난 졸참나무와 상수리나무다.
나는 지금도 옥란재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졸참나무는 ‘김영삼 전대통령나무’이며 상수리나무는 ‘김대중 전대통령나무’가 아닐까 라고 소개한다.
이 두 나무들이 아카시아나무 밭에서 견뎌온 신산의 세월을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 26
으랴. 음지에서 잘 견디는 힘. 즉 음수로서 인고하는 각별한 능력은 아카시아나무의 모진 박해와 탄압에도 마지막 승리의 깃발을 올리게 했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결국 이 나무들의 성장과 승리의 역사도 아카시아나무가 이루어놓은 토양 위에서 쓰여 졌다는 사실이다.
60년대와 7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심어졌고, 산림녹화에 이바지한 우리의 아카시아나무의 전성기는 산업화를 추진하던 박정희전대통령의 시대와 우연하게 일치한다. 3선개현과 유신독재의 칼날은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아카시아 나무의 맹아력과 줄기에 붙은 무시무시한 가시와 비유해도 낮설지 않다. 그리고 척박한 민둥산을 비옥하게 만들고 경제발전을 통해 빈곤을 퇴치한 업적까지 닮아있다.
이런 아까시아나무를 많은 사람들이 ‘나쁜 나무’라고 불러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박정희 전대통령을 ‘나쁜 대통령’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유신독재의 폐해를 논할 수는 있지만 그가 그렇게 해서 이룩한 근대화라는 업적까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카시아나무의 일생은 박정희전대통령의 생애와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있다.
박정희와 함께 출현해서 사라져가는 박정희를 닮은 나무
아카시아나무는 권력의 시작부터 권력의 종말까지 박전대통령의 모습을 따라갔다.
박정희처럼 우리의 아카시아나무의 본격적인 등장도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림이 헐벗던 시절이었다.. 해방이후 한국사는 경제적 궁핍과 이념대립의 역사다. 남남 분열과 초기 정부의 무능까지 겹치면서 국민의 실생활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국전쟁이후 대한민국은 모든 생산을 농업에 의존했다. 가난의 대물림은 계속됐고 사회정치세력은 무질서하게 대립과 반목을 거듭했다.
무질서와 혼란이 일상화된 한국사의 한 귀퉁이에서 불쑥 가시(총구)를 내밀며 삐져나온 세력이 박정희 군부 구테타 세력이다.
27아카시아나무 역시 혼란한 시기에 시뻘건 나신만 겨우 드러낸 채 죽어가는 한국의 민둥산에 그 큰 가시를 내밀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5.16구테타 주동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겨 버렸듯 아카시아나무에게 헐벗은 산의 운명을 맡기게 된 전말도 닮았다.
자포자기로 무력해진 산야에 강력한 무기를 들고 등장한 아카시아나무는 무엇보다 자비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무다. 어린 조선 소나무가 조금이라도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면 가차 없이 맹아지를 내고 밀집한 줄기로 고사시키는 일도 마지않는다. 초기 사방용 나무로 심어진 오리나무숲도 아카시아나무와 경쟁을 하면 초토화되기 일쑤다. 동시대에 같은 목적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오리나무 리기다나무 은사시나무는 경쟁을 하면 아카시아의 파쇼적 완력을 당해내지 못한다.
구테타 세력 중 일부가 박정희에 의해서 밀려난 것처럼 아카시아나무는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기회를 엿보는 다른 나무를 향해서 절대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참아라. (언제일지 모르지만)훗날 너희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희생을 강요하며 똑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것도 같다.
초기 아카시아나무 숲에는 이따금 새들이 멀리서 열매를 먹고 날아와 배설을 한다.
팥배나무, 산 벚나무, 때죽나무, 음나무 등의 열매는 새들의 좋은 먹이감이다. 이 열매는 새들의 소화기를 거쳐나가면서 산화처리되어 씨앗으로 땅속에 묻히는데 발아율이 매우 높다. 그러나 초기 산림녹화 드라이브를 건 아카시아나무 숲은 이 조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직 토양이 복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빽빽하게 돋아난 어린 아카시아가 드리우는 그늘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가시를 드리운 아카시아 숲에는 동물조차 드나들기 쉽지 않다. 박정희시대가 그랬다.
그러나 자라나는 아카시아 숲은 박전대통령의 근대화계획처럼 산림의 미래를 위한 치 28
밀한 준비를 한다. 공언한대로 산림을 비옥하게 하고 다른 나무들과 함께 내일을 열기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선 홍수 때 토사를 막아주는 뿌리 그물망을 촘촘히 한다. 이 산림복구의 첫 단계로 아카시아나무가 펼친 ‘민둥산의 새마을 운동’은 빠르고 강력한 나무의 생명력에 힘입어 큰 효과를 본다. ‘살기 좋은 새마을’을 향한 박전대통령의 강한 통치력이 농촌마을의 근본적 생활환경을 변화시켰던 것과 같다..
산림을 부흥시키는 방법도 박정희의 방식을 닮았다. 앞서 설명한대로 산업화과정에서 부족한 자본을 일본과 미국에서 얻어다 쓰는 방법처럼 아카시아나무도 부족한 양분을 외부에서 얻어다 썼다. 박정희가 다져낸 한국경제의 초석은 외국의 원조와 차관이 바탕이 됐다. 우리의 아카시아의 뿌리는 땅속에서 찾을 수 없는 양분을 공기 중에서 차용해 쓴다. 이 공기가 빌려준 ‘질소라는 차관’이 토양을 살리는 원천이 된다. 나중에서 안 일이지만 박정희는 끌어온 외국자본의 힘으로 결국 민족자본화를 촉진시킨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 방식과 아카시아나무의 산림 옥토화 전략은 기가 막히게 닮았다.
산이 비옥해지면서 날로 강해지던 아카시아나무 숲에는 여러 가지 위협요인들이 등장한다. 생태계가 복구되면서 아카시아나무가 살던 토양에 미생물 ,진균류 , 초근류, 곤충, 파충류 등 다양한 생명이 깃들자 다른 나무들(음수)도 살아나갈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음수의 숙명처럼 초미량의 빛밖에 얻을 수 없는 삶이란 처연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같은 시기 박정희의 강력한 산업화정책 덕분에 빈사상태의 한국경제는 기초를 다져간 반면 열악한 도시근로자들의 절망적인 삶 또한 표면에 드러났다. 청계 피복공장 근로자인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고개를 들기 시작한 노동과 인권운동은 아카시아나무가 직면한 위협과 닮았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던 참나무류의 음수 몇 그루는 아카시아나무의 탄압에도 잘 견디며 거목으로 자라난 박전대통령의 정적 야당 정치인을 연상시킨다.
거센 외부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박정희는 3선개헌 , 유신헌법 선포 등 초강경 무리수를 두는데 아카시아나무 또한 자신이 혼신을 다 바쳐 만들어놓은 비옥한 토양위에서 29
자라난 정적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통을 키우고 가지를 무성하게 하여 음수에게 줄 빛을 막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수 십년이 지나면 비옥해진 토양과는 달리 아카시아나무는 거꾸로 생장동력이 떨어진다. 박전대통령의 권력 또한 너무나 많은 도전과 위협 속에서 무수한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마사태가 일어났을 때 , 측근 권력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의 때가 갔음을 직감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 경제개발계획 등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전후 초토화된 한국경제를 세계 속으로 진입시킬 토대를 만들어낸 그였지만 자신의 때가 끝나는 것을 예측 못한 점도 똑같다. 정말 기이한 것은 우리의 아카시아나무의 운명이 박전대통령의 종말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물론 참나무 류가 강성하게 자라나 끊임없는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지만, 적은 종(種)을 달리하는 다른 나무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의 키워주고 지켜왔던 그리하여 늘 권력의 동반자라고 태산같이 믿고 있던 바람과 비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바람과 비가 변덕을 일으킨 폭풍우였다고 할까. 천근성으로 뿌리를 내리는 아카시아나무는 수 십 여년이상 자라면 뿌리의 취약성으로 땅위에서 몸을 지탱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권력, 특히 독재 권력이 오래될수록 취약해지는 것처럼 오래된 아카시아나무일 수록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 여기저기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정치적 적들(음수)의 위협에 약화 될 대로 약화 됐음을 안 측근, ‘바람과 비’가 어느 날 기회를 틈타 우리의 거대한 아카시아나무를 향해 ‘빠아앙-’ 저격한 것이다. 이 배반의 저격 현장을 나는 옥란재 뒷산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뒷산 골짜기 ‘아카시아밭’에는 총격을 받아 누워있는 여러 그루의 아카시아나무를 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아카시아밭이 아니다. 다양한 식생들이 사이좋게 분포되어있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숲이다. 물론 김영삼나무와 김대중나무로 명명한 거목들도 만나 30
볼 수 있다. 숲의 산업화를 일궈낸 위대한 아카시아나무가 차지하던 넓은 하늘에는 어느덧 다른 입주자들이 자리를 잡고 치열한 광합성 경쟁을 하고 있다.
아것도 지나가고 저것도 지나간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별하길 좋아하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좋은 사람은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이다. 나쁜 사람 또한 자기한테 잘못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게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모여살기 보다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이 모여 산다. 나무들도 이런 나무 저런 나무가 모여 생명공동체인 숲을 이룬다. 나쁜 나무라고 잘못 알려진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필요한 시기에 우리에게 와서 제 역할과 소임을 다하고 때를 다한 생명체일 뿐이다.
이 과정을 산림과학자들은 숲의 천이(遷移)과정이라고 부른다. 아카시아나무의 꽃에서는 우리나라 전체 꿀 생산량의 대부분을 생산해낸다. 정부도 이런 양봉업의 생산성(사실은 양봉업은 꿀 생산만 뿐만 아니라 농작물 결실에도 공헌을 한다)을 감안해서 양봉농가들의 요구인 아카시아나무를 심자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양봉업을 육성하여 꿀과 기타 봉산물 생산량을 2008년 기준 3500억원에서 2015년 목표 7000억원까지 늘리는 것이 정부 정책으로 발표됐으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카시아나무를 국유림 등에 다시 심겠다는 정책당사자들의 발상은 돌고 도는 숲의 이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이것도 지나가고 저것도 지나간다. . 먹고살기 힘든 시절의 다수확품종으로 온국민의 사랑을 받던 통일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시간은 환경의 변화도 몰고 오고 사람의 생각도 바꾼다.
양수의 운명을 타고났고 박토에 뿌리박고도 공기 중에서 양분을 끌어오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사방용으로 전국에 심어졌던 우리의 아카시아나무 또한 세상의 변화 앞에서 예외 일 수 없다. 자연의 명령인 숲의 천이과정 안에서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화려했던 지난날의 기억을 접고 남은 생을 정리해야할 때를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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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숲은 소나무와 같이 햇볕을 많이 요구하는 양수들이 터를 잡는다. 그 소나무 숲에도 세월이지나면 참나무류를 비롯 낙엽활엽수들이 세를 든다. 언제인가 비교적 그늘을 잘 견디며 지속적으로 자라나던 낙엽활엽수들이 하늘을 장악하면 성장이 느린 소나무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결국 이 숲의 천이과정에서 최후 승자는 참나무 종인 신갈나무다. 북한산 등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비옥해진 골짜기 쪽에 자리 잡았던 소나무들이 사라지고 낙엽활엽수림대가 독차지한 것을 보게 된다. 아카시아나무는 소나무와 같은 양수이지만 생태의 특성이 조금 다르다. 소나무는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식물의 생장을 저해하는 화학물질을 분비하는데 이를 타감(他感)물질이라고 부른다. 타감물질은 뿌리에서도 분비되고 잎에서도 만들어지는데 그 속에서 낙엽활엽수가 싹을 틔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카시아나무도 성장초기에는 촘촘하게 줄기를내어 다른 식생을 차단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큰 나무 몇그루만 성장하게 되고 뿌리와 잎은 비옥한 공간을 만들어내 궁극적으로 다른 식물의 성장을 돕는다. 그러나 모든 양수는 음수에게 권력을 내줘야 하는 숲의 천이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명예롭게 사라져 주어야 하는 것이 천이의 숙명이다. 근대화의 주역인 박전대통령이 권력의 끈을 놓지 못했듯 세상의 모든 기득권은 역사의 무대에서 제발로 걸어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만의 때가 있는 세상에서 어찌 아카시아나무만이 기득권을 지켜낼 수있을까.
순리를 거스르며 살겠다면 그건 아마 아카시아나무들의 오만일 것이다. 밀원림을 조성해야한다면 이 천이과정의 특성에 걸 맞는 헛개나무 백합나무 음나무 등의 새로운 밀원수종을 선택해서 심어야 한다. 세력을 상실해버린 아카시아나무를 적극적으로 심자는 것은 최선의 발상이 될 수 없다.
한국인의 정서속에 애증으로 살아남다
아카시아나무의 흥망성쇠를 잘 말해줄 장소는 옥란재 뒷산과 인근의 숲 뿐만이 아니다. 전국의 모든 야산은 아카시아나무와 얽힌 이야기를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건 아카시아나무와 맺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춘궁기 때 아카시아 꽃으로 밀가루에 버무려먹던 꽃잎 떡을 잊 32
지 못한다. 하긴 나 역시 어린 시절 학교 갔다 오는 길옆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아카시아 꽃을 즐겨 따먹던 기억이 있다.
태풍 곤파스가 지난후의 옥란재 아카시아숲의 모습. 우뚝 서있는 나무는 음수인 참나무다.
초등학교에서 기르는 토끼와 염소먹이를 위해 아카시아 잎을 훑어오라는 숙제도 있었다. 그리고 70년대 초기 왠만한 농가에서는 토끼 한두 마리씩 키웠는데 토끼 먹이로 최고인 아카시아 잎을 따는 역할은 언제나 소년 소녀들의 차지였다.
꽃잎 따먹기 놀이 . 손가락으로 잎을 튕겨서 멀리 보내는 놀이 등 소년들과 동네야산의 아카시아나무는 추억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서로 만난다.
내 기억속에서도 아카시아나무는 아름다운 추억과 나쁜 기억이 상존한다.
싱그러운 꽃향기와 베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 산림을 망치는 ‘나쁜 나무’를 향한 기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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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서 속에는 아카시아나무에 대한 미묘한 애증이 교묘하게 배합되어있다.
어른들은 아카시아 꽂 향기에 도취해 옛 기억의 향수와 추억에 젖다가도 돌연 ‘일제가 심은 나쁜 나무’라며 미움의 화살을 쏜다.
농부들은 미움을 넘어 아예 낫과 톱을 들고 기회만 있으면 아카시아나무를 자른다.
그러나 요즘에 산에 가면 수 십년 전처럼 낫과 손 톱정도로 자를 수 있는 어린 아카시아나무들이 많지 않다. 워낭소리의 주인공 할아버지가 나무를 하는 곳을 자세히 보면 큰 교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이 아니라 공사로 깎여진 척박한 도로 경사면 야산이다. 숲의 최초 천이가 시작되는 양지바른 곳이다. 대부분 우리가 맹렬한 수세의 아카시아나무를 볼 수 있는 곳도 이렇게 인위적으로 생겨난 박토인 불모지에 한정되어있다. 천이가 진행된 숲에서는 어린 아카시아나무가 자랄 수 없다.
나는 지난해 가을 산림조합으로부터 수종갱신 권고를 받았다. 리기다소나무 아카시아나무 등의 잡목림을 베고 조선소나무 혹은 백합나무 등을 심으라는 것이다.
특히 아카시아나무는 쓸모없는 잡목이어서 지방자치단체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베어내고 있다고 한다. ‘남산에 많은 아카시아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소나무를 심는 이유를 아시느냐’고 질문까지 받았다.
그러나 나는 옥란재 뒷산 한 켠으로 밀려나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세력으로 잔존하 는 아카시아나무들을 베어낼 생각이 전혀 없다.
한 때 우리 산의 구원투수로 발탁되어 모두의 희망 속에 심겨졌고 아름다운 노랫말의 가사가 되기도 했지만 이내 고약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천덕꾸러기로 전락된 나무-. 나와 내 아버지, 어린나이에 우리집안의 일꾼으로 들어와 농사를 돕던 용성이 형과의 모진 싸움 속에서도 곧은 줄기를 세우며 강인한 생명력으로 숲의 지배자가 된 나무. 그러나 이제는 곁의 수많은 음수와 경쟁하느라 제법 커진 몸통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락해진 아카시아나무는 어쩌면 산업화 시기를 함께 살아온 우리 모두의 자화상 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전쟁이후의 피폐해진 우리의 삶을 다시 일궈낸 강인한 한국인의 정신사와 궤적을 함께하며 폐허의 산림을 일궈냈지만 온갖 구박과 학대를 받으며 버텨왔던 장엄한 나의 아카시아는 지금도 옥란재 뒷산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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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고 있다기보다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토심 속으로 깊게 뿌리내리지 않는 아카시아나무는 특성상 비옥해진 토양위에서는 50년 이상 생존하는 경
우가 드물다. 그렇다면 맹위를 떨쳤던 한 때의 강력한 이 나무의 권력은 처음부터 장기집권과 무관하지 않았을까. 숲을 복원하고 그 숲에 쓰러져 죽은 뒤에도 거름이 되어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기꺼이 버팀목이 되어줄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한국근대사의 인물이 저격수의 총에 쓰러진 이후 이 인물을 닮은 아카시아나무 또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두려웠고 그 통치의 폭압이 몸서리치도록 싫었지만 모두가 어려울 때 다시 그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다.
번창했던 아카시아나무 숲에 얽힌 많은 사연도 그렇게 한국인의 정서 속에 각인될 것이다.
이제 태풍이 불어 올 때마다 옥란재의 아카시아나무는 하나 둘 ‘총맞은 것처럼’ 구겨져 내려않을 것이다..
아카시아나무가 주저앉은 숲에는 그늘에서 웅크리며 다음 세상을 기다리던 때죽나무 팥배나무 쪽동백나무 참나무류 산벚나무 음나무가 기지개를 펴며 일제히 하늘로 솟구치는 장관이 연출될 것이다.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으랴. 정말이지 영원한 것은 없다.
태풍이 지난후의 이야기
아카시아나무이야기를 마무리할 즈음 나의 숲에는 예기치 않는 손님이 찾아왔다.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바람을 앞세운 태풍 <곤파스>가 서해 바닷가에 있는 우리동네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나는 순간 우주영화에서나 본 듯한 폭풍에 천지가 다 날아가는 공포를 느꼈다. 원시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집안에 꼭꼭 숨어 밖의 변고를 내다 볼 엄두조차 못냈다. 과학에 대한 상식과 매스미디어가 없던 시절 이런 자연의 공포를 만났던 무지했던 사람들에게 ‘신’은 어쩔 수 없는 도피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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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옛집 옥란재에서 태어나 자란 나의 생애동안 처음 만나보는 자연재해였다. 지난해 나는 옥란재를 찾아온 지인들에게 고향에 대한 자랑을 했다. ‘나의 집은 복받은
장소라고 ’ ‘한 번도 수해를 입은 적이 없고 태풍조차 비켜가는 지역이라고’ 이렇게 .우쭐댄 지 한 해만에 옥란재는 전격적으로 태풍의 직격탄을 맞았다
태풍의 직격탄으로 쓰러진 아카시아나무 뿌리에 새로운 맹아지들이 돋아나고 있다.
남쪽 바다에서 열대성 저기압이 생성되어 수증기를 머금으며 이동해 오는 태풍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식이 전무하고 이를 시시각각 알려주는 TV조차 없던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분명 초자연적 신에게 정신적 공황 상태의 진정을 의탁했을 것이다.
태풍은 바람과 함께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순간 폭격 맞은 산야의 풍경 앞에서 아연실색했다. 옥란재 뒷동산의 나무들은 아주 처참한 몰골로 구겨져 버렸고 마당 한 켠에서 70여년을 잘 자라온 소나무 10여그루도 벌렁 누워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36
비교적 뿌리를 단단하게 박고 살아왔던 수령 100여년된 참나무는 우람한 허리가 꺽인 채 널브러졌고 리기다소나무 헛개나무 참중나무 할 것 없이 앞으로 뒤로 곤두박질 친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나의 아카시아나무 숲도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옛날 이곳이 아카시아 밭이었다는 명목을 지탱해주던 수 십 그루의 거목조차 대부분 일자로 누워버렸다. 모두 뿌리를 들고 일어서며 흙을 묻힌 채 넘어진 모습은 강력한 총탄에 저격당한 끔찍한 시신을 연상케 했다.
산림과학원의 육종학자인 정헌관 박사는 1970년대 10%를 육박했던 아카시아림은 이번 태풍으로 전체 산림의 2%에서 1.5%대로 줄어들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양봉농가들의 바램과 정부의 밀원수 늘리기 계획과는 정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북한산, 도봉산 ,청계산, 대모산, 등 서울 근교의 야산에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아카시아나무의 피해가 제일 극심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면 아카시아나무가 전멸되는 것 아닌가’ ‘아카시아 꽃과 향기로운 꿀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우리의 아카시아나무는 결국 이 땅에서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모든 변화의 아픔을 견딜 수 없다’는 정현종시인의 ‘견딜 수 없네’의 시, 한 구절처럼 옥란재 숲의 아카시아나무도 그 향기로운 꽃향기와 함께 ’있다가 없고‘ ’보이다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인공조림을 별도로 하지 않는 한 자연 상태에서는 숲의 천이(遷移)현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카시아나무의 몰락을 막을 방도가 없다.
그러나 돌고 도는 세상의 큰 이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숲의 천이는 참나무 류 같은 음수들의 권력마저 영원히 세세토록 길이 보전해주지 않는다.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만에 하나 산불 같은 재해가 산림을 휩쓸거나 인간이 만든 재앙이 숲을 망친다면 산림 복구를 위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아카시아, 소나무와 같은 양수 류의 나무다. 37
근근이 명을 보존한 소수의 아카시아나무는 그 때까지 몸을 낮추고 잃어버린 권력의 뼈아픔을 체득하며 살아갈 것이다.
태풍으로 키 큰 나무가 쓰러진 나의 숲속에서도 막 돋아난 아카시아 맹아지들이 그날을 위해 다시 고되고 긴 삶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기다리면 때가 온다는 것쯤은 나무들도 다 알고 있다.(*)
홍사종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정동극장장을 역임했고 숙명여대 문화관광학과 교수, 동 대학 정책대학원 주임교수, 문화예술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교내 문화벤처기업 (주)아트노우를 설립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 동양생명에서는 마케팅 자문교수를 역임했다.
정동극장장시절 정동극장의 성공적 운영으로 공기업 경영혁신 최우수상, 지식경영대상 최우수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985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입상 극작가로 활동해왔고, 현재는 미래상상연구소 대표와 옥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있으며 농민신문에 연재 홍사종의 상상칼럼,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국민일보 등 국내 주요 일간지의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 KTV(한국정책방송) 인문학열전 진행자, TV, 대학, 기업등에서 강의를 맡고 있으며 생가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용두리에서 양봉․육림연구․신품종묘목개량 등 농업연구 활동도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