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문화관련자료실]<숲강연자료2>세종로 은행나무의 편지 (홍사종)

옥란문화재단
201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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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일자 조선일보> 세종로 은행나무의 편지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

 

 

세종로 잔디광장 조성으로 자라던 땅에서 쫓겨난 신세…

관용하고 나눠주는 벗으로 더불어 살면 안 될까?

 

 

식목일을 하루 앞둔 오늘 세종로에서 영욕의 한국 근대사를 지켜왔고 가을이면 노오란 잎을 시나브로 물들이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왔던 은행나무인 나는 지금 길 한편에 옮겨 심겨진 채 아주 서글픈 봄날을 맞이하고 있다. 천년 성상도 굳건히 잘 견딘다는 이유로 나는 이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의 시목(市木)이 되었지만 세종로 잔디광장 조성과 일제가 한반도의 영구지배를 위해 심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내가 자라던 땅에서 쫓겨난 신세가 됐다. 붕대로 친친 감은 몸뚱아리 여기저기에 주삿바늘을 꽂은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고 있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눈길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그러나 '일제가 심었다'는 이유는 우리 은행나무를 너무나 모르고 얕잡아 본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일제 치하 이전에도 이 땅에서 온전하게 살아왔고 그대들 인간들이 이 지구에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이 땅을 지켜왔다. 2억8천만년 전부터 우리의 조상은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메타세쿼이아와 함께 땅의 주인으로 터를 잡고 화석나무라 불리며 살아왔다.

 

불과 25만년 전에 출현한 호모사피엔스인 그대들은 은행나무가 살아온 시간을 12시간으로 볼 때 11시 59분 30초에 탄생한 존재일 뿐이다. 그것도 우리가 만들어준 풍요로운 숲에서 삶을 영위하다가 농경을 시작했고, 그 결과 그대들이 자랑하는 지금의 콘크리트 문명을 일구워냈다.

 

하지만 그대들이 만들어낸 문명은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살던 땅에서 베이고 불태워졌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굴욕을 견뎌야 했다. 마치 아메리칸 인디언처럼 원주목(原主木)으로서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채 보잘것없이 살육당해야 하는 처지였다. 최근 바람이 전해준 말에 의하면 가로수 교체사업 등을 이유로 어디론가 실종된 우리의 동료 또한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대들이 지난 수천년 동안 생태계의 최고의 깡패로 군림하는 동안 우리의 삶은 나날이 황폐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훨씬 이전에 출현했던 생물종인 바퀴벌레처럼 인간을 향해 저항하지 않았다. 바퀴벌레는 원주생물인 자신들을 '바퀴벌레 보듯 보는(?)' 인간의 시선에 분노해 세상 곳곳에서 결사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다. 반면 우리는 그대들에게 몸뚱아리를 바둑판과 가구재료로 내어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식들인 열매를 식량으로 나눠줬으며 심지어는 입고 있던 옷인 잎까지 혈전치료제 원료로 내어줬다.

 

당신들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았던 김수환 추기경처럼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었던 것은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가 막힌 것은 기대와 달리 그대들은 언제부터인가 나와 내 조상의 땅인 이 땅을 갈가리 찢어 종이 위에 금 긋고 소위 등기권리증이라는 것을 만들어 갖기 시작했다. 우리 은행나무의 운명과 모든 이 땅의 나무들의 운명은 소유권자에 맡겨진 풍전등화의 신세로 전락했다. 우리 나무들의 땅에서 벌어지는 그대들의 가학행위는 날로 도를 넘어서고 있다.

 

이스라엘도 불과 2천년 전에 조상이 살았다는 성서와 로마사의 근거에 의해 나라라는 등기를 만들어 가졌다. 그대들 인간의 법정도 20년 이상 다툼 없이 온건하게 땅을 점유하면 시효취득 소유권을 인정해준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이 2억8천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아왔다는 명약관화한 증거인 화석을 근거로 우리도 그대들을 향해 땅의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다.

 

그대들은 우리 나무들을 폄하하기 위해 '식물인간'이라는 용어를 즐겨 쓰지만 이 말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쓰는 저급한 용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수억년의 어떠한 고난도 극복해낼 수 있는 지혜를 켜켜이 간직하고 살아왔다. 잘났다는 그 많은 경제학

자를 보유하고도 IMF의 위기와 세계경제공황도 대비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그대들과 달리 우리는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꽃과 잎들을 눈 속에 담은 채 복잡한 성분으로 조직된 껍질을 만들어 위험에 대비하며 미래를 준비한다.

 

그대들은 바퀴벌레는 무서워하면서 왜 나와 내 동료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지 묻고 싶다. 이미 우리의 수많은 동료는 갈변현상을 일으키며 거리 곳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그대들의 학정이 계속되면 나 또한 본의 아닌 '알카에다'가 되어 자폭의 길을 택할지 모른다. 우리가 죽은 이 땅에서 그대들과 후손의 삶이 과연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다시 찾아온 나무의 계절을 맞이하여 그대들의 소유가 아닌 끊임없이 관용하고 나눠주는 아름다운 벗의 자격으로 삼가 외쳐본다. 더불어 살면 안 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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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옥란문화재단은 설립자 홍사종이 그의 모친 옥란 이재복 여사와 부친 홍극유 선생의 뜻을 받들어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영종이길 120-8번지 일대의 전통한옥과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가대(家垈)를 출연 다문화가정 지원사업과 농촌사회 경제 문화 발전을 위해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옥란재단의 家垈는 소설가 박태순 선생이, ‘한국 전통의 원림문화를 오늘의 산업 사회에 어떻게 계승할 수 있는지 살필 수 있게 하는 참으로 희귀한 녹색의 장원’이라 극찬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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